안렴사공 묘소 발견과 양성현감공 묘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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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운 회 작성일06-03-27 16:14 조회1,550회 댓글2건본문
안렴사공 묘소 발견과 양성현감공 묘소에 대하여
주회씨의 견해가 안렴사공의 묘소 발견과정을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생각을 달리 하는 것이 있어
문제를 제기합니다.
1. 기존의 참고 자료
안렴사공의 묘소 발견에 대해 인용하는 자료는 대부분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초반까지 살았던 김래찬, 홍양호, 남공철의 기록들입니다.
그 외 고충지는 기존의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보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족보의 기록은 연대가 명시되지 않아 이와같은
놀란을 초래하고 있읍니다.
주회씨가 2005년 7월 11일에 올린 "안렴사공 묘소 발견에 관한 이견
구명 요청"에 의하면 홍양호의 "오은 안렴사 김선생 시장 초기"나 남공철
의 "안렴사 김공 묘갈록" 모두 양성현감 휘 취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안렴사공의 지석을 발견하였다고 되어 있읍니다.(원문은 확인하지 못함)
이는 양성현감공의 서거 추정 년도와 안렴사공의 지석 발견 년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 180여년의 시차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므로당대의
많은 충신들이 평총을 했다고 생각하고 실전한 것으로 기록한 듯 합니다.
2. 남공철의 안렴사공 신도비문
문영공 종사록에 실린 안렴사공 신도비문에 의하면 "공의 사후 300여년
만에 후손이 처음으로 지문"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숙종 4년에는 그
고을 유생들이 공의 사당을 송천에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또한 주회씨의 견해 4)에서와 같이 홍양호도 "숙종 4년 평총한
무덤에서 지석을 발견"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읍니다.
3. 결론
상기와 같이 당대의 석학들 조차 기록할 때마다 차이가 있고, 정작 선조
들의 행적에 관심을 가졌어야 할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아 우리가 새로운 자료를 구하기까지는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어려울 것 깥습니다.
그러므로
1) 양성공의 묘소가 실전되었는지 여부
2) 안렴사공의 묘소 발견 년도가 숙종 4년인지 여부
3) 양성공의 묘소가 실전되지 않았다면 양성공의 산지를 구하게 된 동기
등을 대종회나 안렴사공파 종회에서 유권 해석을 내려 소모적인 논쟁을
마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김용주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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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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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나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현재 양성공 (휘)취 선조님의 묘는 실전 되지 않았쓸수있다 왜야하면 현재 묘소앞에 있는 선조님의 묘비의 형태로 보아 조선조 중기이전의 형태임
안렴사공의 묘소 발견년도에 대하여서는 세분다 외지분들에 의해서 작성 되었씀
양성공 (휘)취 선조님의 산지을 구하게된 동기는 돌아가시고 바로 장사을 지낼때일수도 있다고 생각함.
로시난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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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난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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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그럼 지금으로 부터 가장 오래된 기록은 묘비석이네요. 홍지10년이라고 기록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