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45) 도산의 여동생과 약혼-그리고 파혼
페이지 정보
김영환 작성일02-04-22 19:30 조회1,880회 댓글0건본문
선생님은 여옥과 사별한 후 그해 해주 장연으로 이사하시었으며
여기에서 선생은 교육사업에 전념하시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인 안신호와의 약혼이 있었습니다.
약혼이란 지금같이 약혼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혼인하기로 약속하면
그것 자체가 약혼이었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안신호와의 약혼도 곧바로 깨지는 슬픔을 맛보시게 되니,,
백범 일지에서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그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 진사(吳進士) 인형(寅炯)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 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泰洙)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信愛), 아들 기원(基元), 오봉형(吳鳳炯)의 아들 둘,
오면형(吳勉炯)의 아들과 딸, 오순형(吳舜炯)의 딸 형제와 그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를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셋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고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1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白南薰)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鳳陽學校)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지리·역사 등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친 것은 장연 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의
명성(明星)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
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 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어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
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 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金聖澤) - 뒤에 목사가 되었다 -
와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 김은회 -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주회 -
▣ 김영윤 -
▣ 김영윤 -
▣ 김영윤 -
여기에서 선생은 교육사업에 전념하시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인 안신호와의 약혼이 있었습니다.
약혼이란 지금같이 약혼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혼인하기로 약속하면
그것 자체가 약혼이었던 시절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안신호와의 약혼도 곧바로 깨지는 슬픔을 맛보시게 되니,,
백범 일지에서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그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 진사(吳進士) 인형(寅炯)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 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泰洙)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信愛), 아들 기원(基元), 오봉형(吳鳳炯)의 아들 둘,
오면형(吳勉炯)의 아들과 딸, 오순형(吳舜炯)의 딸 형제와 그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를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셋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고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1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白南薰)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鳳陽學校)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지리·역사 등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친 것은 장연 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安信浩)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의
명성(明星)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李錫寬)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
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 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어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梁柱三)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
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 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金聖澤) - 뒤에 목사가 되었다 -
와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 김은회 -
▣ 김재익 -
▣ 김항용 -
▣ 김주회 -
▣ 김영윤 -
▣ 김영윤 -
▣ 김영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