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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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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3-31 15:42 조회1,4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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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당신이 나를 두고 먼저 갈 수도 있다고? 그는 아내가 누워있는 방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그냥, 당신이 갈 수도 있다고? 우리가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고? 그가 섬돌 위에 발을 올렸을 때 뒤에서 어머니가 불렀다. 성립이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감정이 배어있지 않은 어머니의 음성이 이어졌다.
   『자네는 서재로 가시게. 대과 일자가 바로 코앞이야. 며늘아기는 우리가 보살필 테니까.』
 푸른 달빛에 비친 어머니의 단아한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차갑고 싸늘하게 보였다. 그는 가슴 저 밑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말로 만들어 어머니에게 한마디 던지려다 그냥 돌아서 섬돌로 올라섰다. 그는 장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약재냄새. 그는 곤혹스러웠다. 언제나 향기로울 것 같았던 아내에게서 이런 냄새가 난다는 것은. 그가 아내 옆으로 가자 아내를 수심스런 얼굴로 내려다 보고있던 소순이 말없이 방석을 내주었다. 그런 소순의 몸짓에 졸음이 묻어 있었다. 몸종 소순은 산통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아내 옆에서 붙어있다시피 했다.
 흔들리는 등피 불빛아래, 아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는 누워있는 아내 옆에, 소순이 내어준 방석을 깔고 앉았다. 성립은 잠든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 부은 얼굴. 창백한 안색. 죽은 듯 누워있는 아내에게서 그전의 모습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때 내 아름다웠던 여인.
 아내의 눈가에 한줄기 물기가 있었다. 땀일까. 아니면 눈물일까? 그는 소순이 놓아둔 물수건으로 가만히 아내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었다. 아내는 아주 미약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아내가 문득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약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잠이 깨어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잠든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길을 외면하는 것이었을까? 성립은 손길을 멈추고 무연히 아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내는 깨어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벽 쪽으로 약간 얼굴을 돌리고 잠들어 있었다. 가끔 약간 벌어진 입으로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그러나 그 자세가 마치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두에게 축복 받는 혼례였었는데. 그가 복잡한 심사로 고개를 드는데, 아내 너머에 있는 서가(書架)가 눈에 들어왔다. 서가에 가득 쌓인 책. 그는 일어서서 서가 쪽으로 갔다. 간병하며 시간을 보내는 데는 책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서가를 뒤적이다 아직 먹빛이 선명한 책 한 권을 집었다. 어제는 보지 못한 아내의 시첩(詩帖)이었다.
 아내는 산통이 시작된 후에도 시를 쓰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 책, 아니 이놈의 詩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잠시 복잡한 심경으로 시첩을 내려다보다, 그는 소순이 아내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순이 조는 것이 무리는 아니리라. 그는 겨우 이틀 밤을 샜는데도 눈꺼풀이 무거운데, 소순은 아내의 산통이 시작된 이후로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그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가볍게 쳤다. 소순이 놀라서 깨어났다. 소순의 당황한 눈빛. 무어라 소순이 변명하기 전에 성립이 말했다.
  『  여기는 내가 있을 테니까 자네는 가서 눈을 좀 붙이게. 』
  『서방님 괜찮어유, 잠깐 졸았을 뿐이어유. 아씨 곁에는 제가 있어야… 』 소순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성립의 음성이 다소 엄해졌다.
   『 그럼 가서 쉬고 내일아침에 일찍 와. 』
 성립의 성격을 아는 소순이 마지못한 듯, 일어서서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말했다.
   『 서방님도 피곤하실 텐데…, 그럼 쇤네 물러갑니다요. 』
 소순이 나가자 성립은 시첩을 펼쳤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표제 글씨가 낯설다 했더니, 평소 눈에 익은 아내의 필체가 아니었다. 아내의 필체도 웬만큼 수련한 서도가의 수준을 넘었다. 그러나 표제 글씨는 그런 수준의 글씨가 아닌 명인(名人)의 글씨였다. 어찌 보면 한호(韓濩)의 글씨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봉래선생의 글씨 같기도 했다. 그러나 표제 글씨는 그 두 명의 글씨의 장점을 취했으나 그 두 명인이 갖지 못한 독특한 골기(骨氣)가 있는 또 다른 명인의 글씨였다. 누굴까, 내가 모르는 당대명인이?
 …아내가 명인의 글씨로 시첩을 만들었다는 것은, 시집을 출판할 목판을 뜨기 위한 글씨로 받아왔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아내는 기어이 시집을 출판하겠다는 이야기가 된다. 생각이 그에 미친 성립은 가라앉혀 놓았던 분노가 문득 다시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내를 내려다보다가 시첩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아내는 환자였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겨우 화를 참고, 시첩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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