都岩 金泰榮 (도암 김태영, 제학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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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22 21:03 조회1,935회 댓글0건본문
都岩 金泰榮 (도암 김태영, 제학공파)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3호 (1999년 1월) 에 실린 [都岩 金泰榮의 인생역정과 참회] 내용을 소개합니다.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3호 (1999년 1월)
⊙ 都岩 金泰榮의 인생역정과 참회
도암 태영은 제학공 21대손 분파조 교관공 휘時進의 13대종손 휘璣應의 4남2녀중 넷째 아들로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하백전에서 출생하여, 목천초등학교를 수료하고 才藝가 뛰어났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진학을 못하였다.
방년 16세에 연안인 이육진 여사와 결혼을 하였으며 다음해에 모친 기계유씨께서 별세하심으로 앞날이 막막하여 고뇌에 시달리고 있던 차에 이렇게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집을 나서야 하겠다는 충동이 생겨 어머님의 탈상도 못한 채 전도를 개척하겠다는 마음으로 철없는 18세 소년기에 사회에 발을 내 디디었다.
21세때 국립 대전잠사연구소 7개월 특강생으로 입사하여 그 재질을 인정받아 기술관리로 임명을 받아 재직하였으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23세 되던 해에 일본 대림건설회사 소속으로 만주에 들어가 제철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귀국케 되었다.
29세에 신건산업(주)을 창립하여 일을 해 오던 중
33세때 6.25전쟁이 일어나므로 잠시 고향 병천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33세 11월 서울 수복으로 서울에 올라가 다시 건설업을 시작하여 정부청사 3개처와 장차관 관사 12개동의 복구공사를 마치고 청와대 육각정 보수를 성공리에 마침으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난데없는 투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본즉 공사관계를 업자들 난입으로 총무처 사건인 정치적 싸움에 표적이 되어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후에 무죄를 인정받아 석방되어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한동안 쉰 뒤에 다시 병천에서 건설사를 창설하여 충남북 일원의 토건사업을 하면서 백전문화원을 개설하여 초대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병천면장을 역임하고 45세에 다시 대전 대동건설(주) 부사장으로 취임, 태국으로 나가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무사히 마치고
논산 육군훈련소 육군병원 신축공사와 대전 대덕지구 도로건설공사, 원자력공단 부지조성공사, 전주지방법원 검찰청 신축공사 등 국내외 큰 공사를 도맡아 한 건설업계의 거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貧富苦甘의 체험을 다 하였고 사회봉사 활동도 끊임없이 해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26세에서 28세까지 만주 본계호시 5족협화회 한국측 보도위원을 역임했으며
40세에 천안 병천 백전문화원장, 병천 농업협동조합장, 대전 중촌동 노인회장, 70세에서 현재까지 안동김씨 대전지구 종친회장을 맡아왔다.
그의 전성기에는 사회공동체에 많은 협찬을 한 일이다.
그 가운데는 고향 선영하에 영모재 신축사업에 현시가 쌀 40가마 상당을 협찬하였고,
병천초등학교 2학급 교실 신축비에 살 400가마 상당과
병천면사무소 신축비 쌀 400가마,
병천소방서 창고와 기구 구입비에 쌀 400가마를 협찬했으며
특히 만주 요령성 본계호시 태자하 한국인초등학교 4학급교실 신축비 쌀 1000가마 상당의 건축비를 협찬한 독지가이기도 하다.
이는 또 파란만장한 생활가운데 제일 추억에 남는 것은 빈손으로 18세 어린 나이로 등짐 보행의 방랑생활이라 한다. 만년필 봇짐장사로 13개도 211개군을 매일 1개군씩 다닌 일과 23세에 만주에 들어가 26세 되던 해 큰 돈을 만져본 일 등이 추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행도 불행도 많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설사업 50년에 단 한건의 사고가 없었던 것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살아온 세월 어느덧 傘壽(80)을 넘으니 후회스러움은 부모님께 불효한 것을 가장 후회하고 있으며 이를 만분의 일이라도 참회키 위하여 거주지 대전에서 대전지역종친회 회장으로 10년간 있으면서 先世貫鄕巡禮를 하였다.
제일 먼저 경주 태보공 숭혜전과 계림비각을 시작으로 경순왕릉 참배,
충렬공 묘소 및 신도비각, 회곡동 죽주박씨 할머님 단소와 유허비각,
강진에 판서공 선 제학고 승용, 평리공 후 묘소
경기 광주 개성윤공 칠림
충남 연기 흔조 사적비 제막식
단양 문영공 산소
병천에 문숙공 상락백공 제학공 단소 참배
오창 정간공 영삼사사공 단소, 안렴사공 묘소 참배
경남 함양 익원공 영정각
전북 고창 익원공 부조묘
경기 포천 문정공 효소공 묘소
경남 진주 시민창렬사
서울 효창공원 백범선생 묘소
천안 목천 독립기념관 시민어록비 등 종친회원과 같이 춘추행사로 실천하여 왔다.
슬하에는 4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政植은 서울대학과 연세대학에서 일본어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중앙일보 미국지사 편집국장 겸 지사장으로 있으며,
둘째 滿植은 충남대학과 연세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현재 주미 시카고 총영사관 행정실장으로 있으며,
셋째 成植은 육군공병학교를 졸업 수송장교로 월남에 파병하여 소령으로 예편 현재 아세아시멘트 레미컨 공장 과장으로 있으며,
넷째 浣植은 한남대를 졸업하고 현재 충청은행 감사직에 있으며,
손 容奭은 미국 UC어바인 대학과 남가주대학 치과대를 졸업하였으며,
또 손 換은 미국 예일대학 UCLA 캘리포니아 대학원을 졸업하고 당교 조교수로 재직중이며,
만식의 자 勳은 미국 하버드대학과 동 대학원 법과를 수료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 현재 국제 변호사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손 智勇은 대덕 연구단지에서 기계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으니
태영 종친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지냈으나 해야 할 일들을 다 한 분으로 우리 문중의 인물이며 인생 80을 똑바르게 사신 분이라 믿는다.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3호 (1999년 1월)
⊙ 勳 현종 국제 변호사
제학공 23대손 勳은 현재 미국 시카고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제학공 15대손 휘時進의 종손가 막내집 泰榮종친의 둘째아들 滿植(현 주미 시카고 총영사관 행정실장)의 둘째 아들로
초중학교 시절부터 머리가 좋아 미 일리노이주 과학경기 대회에 출품한 작품이 1등으로 입선하고 일리노이 주립 수학과학 영재 고등학교에 수석졸업을 하고
하바드 대학을 특차로 입학하여 수석졸업과 동시에 국제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여 하와이주에서 변호사로 재직하고 있는 천재종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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