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문온공의 교류인물(1) 목은 이색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04-05 15:36 조회1,585회 댓글0건

본문

문온공(척약재 김구용)께서 교류하셨던 분들에 대해서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문온공과 가장 가까웠던 분을  손꼽으면 우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호정 하륜, 둔촌 이집 삼봉 정도전 등

당대의 정계와 학계를 주름잡았던 분들이십니다.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가까웠던 분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문온공의 교류인물들

(1) 목은 이색

목은 이색선생은 아시다시피 문온공보다 10년 연상이시지만 항상 친구처럼 지내셨던 분입니다.

성균관을 중영할때 목은은 대사성으로 문온공은 학관으로 참여하시었습니다.

척약재학음집에도 목은께서 지으신 시, 서, 발 , 명 등 교류한 문헌이 대단히 많습니다.

 

관련 자료

[척약재학음후]. [척약재명][송강릉도안렴사김선생시서][육우당기][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이외에 주고 받은 시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시 한 수 올립니다.   이시는 금수정에 세워진 시비에도 새겨진 시 입니다.

 

道美寺奇敬之 牧隱 李穡 도미사에서 경지에게

 

六友堂中君者居 (육우당중군자거)/ 육우당은 군자가 사시는곳

滿天淸興更無餘 (만천청흥갱무여 )/ 맑은흥취 하늘가득 남음이 없고

滂江佳處多苛絶 ( 방강가처다가절)/ 여강 가는곳 마다 절경 아닌곳 없으니

慾乞殘生對結盧 (욕걸잔생대결로)/ 남은여생 그대 옆에 집짓고 살고싶네

 

원운

寄敬之 (기경지) 둔촌 이집/ 경지(김구용)에게 부치다

 

江樓高處是君居 (강루고처시군거) / 강루(江樓)의 높다란 곳이 그대의 거처인데

隔岸相望十里餘 (격안상망십리여) / 언덕을 사이하고 마주보니 십리남짓 하구려

一棹往來應數數 (일도왕래응수삭) / 노를 저어 오고감이 빈번해야 할터이니

此間吾亦結芽廬 (차간오역결아려) / 이쯤에다 나도역시 초가한칸 지으려네

 

附次韻 척若齋金九容 (부차운 척약재 김구용) / 척약재 김구용의 차운

 

曾約黃驪共卜居 (증약황여공복거) / 황여(黃驪)에 함께살자 일찍이 언약 했건만

奔馳南北十年餘 (분치남북십년여) / 남북(南北)으로 쏘다니기 십년이 넘었구려

如今始遂平生志 (여금시송평생지) / 이제는 아마 평생의 뜻을 이뤘을거라 여겼더니

猶自江邊未構廬 (유자강변미구려) / 아직도 강가에다 집한채 못지었단 말인가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瑴)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 출사 및 관직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2. 고려말 창왕옹립과 유배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23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3. 사상과 학문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李穡硏究(李銀順, 梨大史苑 4, 1962)
牧隱硏究(孫洛範, 國際大學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3, 1975)
李穡의 佛敎觀(安啓賢,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李穡(李相殷, 高麗·朝鮮初期의 學者 9人, 1974)
牧隱 李穡과 그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朴珠, 曉星女子大學論文集 25, 1982). 〈閔丙河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