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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8) 민족에 내놓은 몸4. 국맥(國脈)을 잇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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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4-05 15:46 조회1,5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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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맥(國脈)을 잇자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 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에 나도 출석하였다. 그 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金道熙)와 그리고 나 김 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摠監)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國脈)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 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 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 원, 강원은 10만 원, 경기는 20만 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庚戌) 11월 아침 차로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寅鐸)이 재평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 회의에거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柳文馨) 등 이곳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李明瑞)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여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 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安明根)이가 양산 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 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날더러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 내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 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 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 동안만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종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雪 )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해졌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새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 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간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간다. 가 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都寅權),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 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왔다. 경무총감부(警務總監府)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구류하였다가 2,3일 후에 재령으로 이수하였다.

재령에서 또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회 반정(泮亭) 신석충(申錫忠)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進士)는 해서의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錫悌)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洛英)과 손자 상호(相浩)가 동구까지 마중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 - 그 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 형사 하나가 뛰어 올라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지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간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것을 만들어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 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서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은 황해도에서는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李源植), 박만준(朴晩俊), 신백서(申伯瑞), 이학구(李學九), 유원봉(柳元鳳), 유문형, 이승조(李承祚), 박제윤(朴濟潤), 배경진(裵敬鎭), 최중호(崔重鎬), 재령에서 정달하(鄭達河), 민영룡(閔泳龍), 신효범(申孝範),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楊成鎭), 김 구, 박도병(朴道秉), 박형병(朴亨秉), 고봉수(高鳳洙), 한정교, 최익형(崔益亨),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李泰周), 장응선(張膺善), 원행섭, 김용진 등이요, 장련에서 장의택(張義澤), 장원용(莊元容), 최상륜(崔商崙), 은율에서 김용원(金容遠), 송화에서 오덕겸(吳德謙), 장홍범(張弘範), 권태선, 이종록, 감익룡(甘益龍),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李在林), 김영택(金榮澤), 봉산에서 이승길(李承吉), 이효건(李孝健),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金秉玉), 연안에서 편강렬(片康烈) 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柳東悅), 김용규(金龍圭)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李東輝)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지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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