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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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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4-06 16:52 조회1,57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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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김영희 작가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곳 : http://newsisfeel.com/

  

 

 

 

   4. 농조아(弄潮兒)

 안채와 후원별채를 가르는 담 앞에서, 그는 담 문을 밀다 무엇에 끌리듯 뒤를 돌아보았다. 별채가 저만큼 멀어져, 아침 적요 속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문은 언제나처럼 닫혀있고, 그 문안에 사람이 있건만 기척하나 없었다. 닫힌 문.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닫고 나온 문.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닫고 나온 그 문이 완강하게 그를 밀어내고 있는 듯 했다. 시집, 아내가 시집을 내려하고 있다.
 그는 문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난설헌(蘭雪軒). 아내는 2년 전 후원으로 옮기면서 자신의 거처에 난설헌(蘭雪軒)이란 당호(堂號)를 직접 써 붙였다. 난설헌. 난과 설…, 두 낱말은 난이 추위를 꺼리는 식물이어서 쉬이 복합어가 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마 아내는, 눈 속에서도 살아남아 그윽한 향을 피워 올리겠다는 마음으로 저 당호를 쓴 모양이었다. 난설헌. 어쩌면 자신은 난이고, 나는 설이란 뜻으로 저런 당호를 쓴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는 쓰게 웃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담장 문을 밀고 뒤란을 거쳐 안채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하루일과를 준비하던 비복(婢僕)들이 인사를 했다. 그는 건성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넘기고, 어머니에게 아침 문안을 하기 위해 안방으로 향하다 사랑채 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어머니에게 면매(面罵)를 당하기 싫었다. 어젯밤에도 아내를 간병하며 밤을 새운 것을 어머니는 또 나무랄 것이 분명했다. 장부가 일의 경중대소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주변 동접(同接)들이 하나 둘 등과를 하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과거가 다가오면 본인보다 더 과거에 집착을 보였다. 선친 시묘가 끝나자 그 성마름은 더 심해졌다. 어머니의 등과에 대한 집착은 그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사랑채로 통하는 문을 들어서자 그는 곧바로 등뒤로 문을 닫았다, 어머니의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듯… 피곤했다. 모두가 귀찮았다. 아내도, 어머니도. 그는 사랑채 앞 퇴로 올라섰다.
 사랑으로 들자 바로 안채에서 보내온 아침상을 받았으나 입맛이 없었다.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상을 물리고, 그는 자리를 펴고 누웠다.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다하나 며칠동안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해 몸이 무거웠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쉽게 오질 않았다. 아마 낮잠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리라.
 그는 몸을 뒤척였다. 아내의 병색 짙은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러다 문득, 간밤에 아내 옆에서 읽은 그녀의 시구(詩句) 하나가 뇌리에 떠올랐다. 농조아(弄潮兒). 농조아. 내가 뱃놀이나 하는 놈이라고? 그 시구(詩句)를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이미 정이 남아있는 아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의 아이를 낳다 위경에 빠진 아내였기에 그동안 함께 한 세월과 부부라는 강상(綱常)때문에 그나마 한 가닥 남아있는 연민이었다.
 그런데 농조아라, 농조아. 철없던 나이, 한 때, 그 또래 동접들은 누구나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락을 그녀는 여직 가슴에 담아두어 한으로 키워왔던 모양이었다. 그때 뱃놀이를 함께 한 동접들의 아내들 가운데 초희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부인네가 있다는 소리를 그는 들은 적이 없었다. 아내는 결혼 초부터 유난히 민감하고 투기(妬忌)가 심한 여자였다. 농조아라, 농조아.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집착이 없다면 사랑도 없겠죠
하지만 시든 사랑에 집착한다면 가슴만 아픈 것을
쉬 잊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랑인가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