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인명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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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23 03:56 조회2,501회 댓글0건본문
국립중앙박물관 [인명사전] 발췌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인명사전] 란이 있는데
"본 인명사전 자료는 서울시의 [서울 六百年史 인물]편을 재 편집한 것 입니다." 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 선안동김씨 선조님을 찾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참고자료로 활용시에 모두 찾아보는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정리하였습니다.
일부 기록은 [디지털한국학] 등 자료 문헌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이 있고, 특히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유헌 (金裕憲)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회명 (金會溟)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회상 (金會祥)
기록은 다른 자료에서는 찾지 못했던 새로 찾아낸 내용입니다.
한글(한자)이름 ★(문온) 김경운 (金慶雲)
기원기준 A.D
호
자
출생년 미상
사망년 1624(인조 2)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무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관련항목
이력사항
?∼1624(인조 2).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응함(金應緘)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광해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광해군 10년(1618) 사과(司果)를 거쳐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출상소에 참여하였다. 1618년 양계(兩界)의 한 고을에 수령(守令)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나아갔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으면서 휘하 병사를 이끌고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전투(鞍峴戰鬪)에 참여하였으며 앞장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한글(한자)이름 ★(안렴) 김공망 (金公望)
기원기준 A.D
호
자 위수(渭馬)
출생년 1482(성종 13)
사망년 1528(중종 23)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482(성종 13)∼1528(중종 2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수(渭馬)로 오위 부장(五衛副將) 김성(金城)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출신으로서 사림계(士林系) 인물(人物)이다. 중종 1년(1506)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된 뒤, 성균관 전적(典籍)과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두루 거쳐, 정언(正言) · 지평(持平) 등 청직(淸職)을 역임하였다. 1521년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있다가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아감에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형옥(刑獄)을 공정히 처리하였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글(한자)이름 ★(군사) 김광국 (金光國)
기원기준 A.D
호
자 대관(大觀)
출생년 1685(숙종 11)
사망년 미상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간독(簡牘)》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685(숙종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관(大觀)으로 승지 김준원(金俊元)의 현손이며 김담(金湛)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남부 회현방 장동(충무로1가 · 회현동 2가 지역)에 살았다. 영조 11년(1735)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 장령(掌令)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치고 1755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사간 · 승지 · 황주 목사 등을 차례로 역임한 후 1769년 도승지에 올랐으며, 이어 병조 참판까지 지냈다. 편저로 《간독(簡牘)》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안정) 김구덕 (金九德)
기원기준 A.D
호
자
출생년 미상
사망년 1428(세종 10)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안정(安靖)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考
관련항목
이력사항
?∼1428(세종 10).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평장사(平章事)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사헌부 규정(糾正) · 잡단(雜端)이 되고, 태조 5년(1396)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단양 · 청풍 · 한산의 군수와 해주 · 광주 · 청주 목사를 역임한 후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을 때 딸이 태종 후궁으로 명빈(明嬪)이 되자 우군 동지 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랐다. 태종 12년(1412) 7월 13일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지내고, 강원도 관찰사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4월 4일 다시 한성부 윤이 되었으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까지 올랐다. 성격이 원만하고 문장에 능했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노 (金魯)
기원기준 A.D
호 동고(東皐)
자 경참(景參)
출생년 1498(연산군 4)
사망년 1548(명종 3)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서예가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이가서법(二家書法)》,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글씨),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글씨),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글씨)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湖陰雜稿, 槿域書畵徵
관련항목 김수(金邈)
이력사항
1498(연산군 4)∼1548(명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참(景參), 호는 동고(東皐)이다. 대사헌 유연재(悠然齋) 김희수(金希壽)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 · 서예가이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에 초임되고 이어 검열 · 정자를 지냈다. 1530년 저작(著作)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석방을 비난하였다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자 문의(文義)에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직제학에 기용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론(學論)에 밝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왕희지 · 왕헌지의 전기(傳記) · 필적(筆蹟)을 가지고 학습하였다. 조정의 각종 전책(典冊)과 고관명사들의 비문을 많이 썼다. 부자가 모두 명필로서 그의 필적으로 글씨를 새겨 간행한 《이가서법(二家書法)》이 있으며, 경기도 광주의 〈제안대군침묘비(齊安大君琛墓碑)〉 · 파주의 〈성청송수침묘비(成聽松守琛墓碑)〉 · 〈영상정광필묘비(領相鄭光弼墓碑)〉 등이 그의 글씨이다.
한글(한자)이름 ★(안정) 김뉴 (金紐)
기원기준 A.D
호 금헌(琴軒)
자 자고(子固)
출생년 1420(세종 2)
사망년 미상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弁齋叢話, 國朝榜目, 於于野譚
관련항목 김굉필(金宏弼)
이력사항
1420(세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 취헌(翠軒) · 쌍계재(雙溪齋) · 관후암(觀後庵) · 상락거사(上洛居士)이며 김중엄(金仲淹)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자 조대림(趙大臨)의 딸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조 10년(1464)에 녹사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호조 좌랑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다. 1466년 발영시 · 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 · 유희익(兪希益) 등과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 직제학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기여했다. 성종 1년(1470) 완성단계의 《경국대전》을 재수교, 1472년 저화법(楮貨法) 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1478년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지방에 석보(石?)를 쌓고, 함경도 등에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1481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 사직(行司直)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 참판이 되었다.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한 옛날 서울에 어떤 집이 있었는데 가격이 오천필이나 하였다. 그 집에는 요괴가 들어 사람마다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나자 김뉴가 헐값으로 그 집을 사들여 혼자 하룻밤을 지냈다. 밤이 되자 흰옷 입은 중 일곱이 들어오다가 그가 기침을 하자 돌층계 위의 대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날이 밝자 대나무를 헤쳐보니 은으로 만든 부처가 일곱이나 있었다. 둘은 나라에 바치고, 남은 것은 궁핍한 친구에게 주고, 나머지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 · 〈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득신 (金得臣)
기원기준 A.D
호 백곡(栢谷)
자 자공(子公)
출생년 1604(선조 37)
사망년 1684(숙종 10)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시인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종남총지(終南叢志)》, 《백곡문집(栢谷文集)》,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
참고문헌 栢谷文集, 終南叢志硏究(許敬震, 연세어문학)
관련항목 김양신(金良臣) 김하종(金夏鍾)
이력사항
1604(선조 37)∼1684(숙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또는 구석산인(龜石山人)이다.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손자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천(泗川) 목씨(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아내는 경주 김씨이며,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당시 한문 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현종 3년(166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을 습봉(襲封)했다. 〈백이전(伯夷傳)〉을 억만번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하였다. 문보다는 시, 특히 오언 · 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또한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으며,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문집으로 《백곡문집(栢谷文集)》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변광 (金季光)
기원기준 A.D
호
자 경실(景實)
출생년 1694(숙종 20)
사망년 미상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牧民心書, 國朝人物志
관련항목
이력사항
1694(숙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실(景實)로 승지 김구만(金龜萬)의 손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종 3년(17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뒤 병조 정랑과 용강 현령을 역임하고, 영조 41년(1765) 공조 참의로서 벼슬에서 물러난 뒤 후진 양성에 힘썼다. 용강 현령으로 있을 때 권력을 쥐고 있던 윤모(尹某) 재상의 청탁을 물리친 일화가 목민심서에 전하고 있다. 정조 20년(1796) 호군 채홍(蔡弘)의 천거로 사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사형 (金士衡)
기원기준 A.D
호 낙포(洛圃)
자 평보(平甫)
출생년 1333(충혜왕 복위 2)
사망년 1407(태종 7)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관련항목 김작(金殯) 민개(閔開) 이무(李茂) 김수동(金壽童)
이력사항
1333(충혜왕 복위 2)∼1407(태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로서 상락후(上洛后8 김영후(金永煦)의 손자이며, 부밀직사사 김천(金?)의 아들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후에 개성 부윤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고, 공양왕 2년(1390)에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을 지내다가 곧 지문하부사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 찬성사로 판상서사사와 병조 전서를 겸하였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 때 적장자를 후사로 세울 것을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1년(1399)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 태종 1년(1401)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어 이듬해 영사평부사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 태조가 극진히 아낀 신하 중의 한 사람이며 신중하고 분수를 지키는 처세로 벼슬을 지냈다.
한글(한자)이름 ★(부사) 김선필 (金善弼)
기원기준 A.D
호
자 중필(仲弼)
출생년 1807(순조 7)
사망년 1883(고종 20)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무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登壇錄
관련항목
이력사항
1807(순조 7)∼1883(고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필(仲弼)로서 김학기(金學基)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김정기(金鼎基)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는 것으로 보아 양부에게로 입양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순조 29년(1829)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 충청도 병마절도사사를 역임하였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는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친 선봉장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부평(富平)에 주둔하면서 수도 방위를 담당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전사한 진무 중군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가 되어 중군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설치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렀다. 1882년 잠시 강화부 유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글(한자)이름 ★(안렴) 김세익 (金世翊)
기원기준 A.D
호
자 양경(亮卿)
출생년 1634(인조 12)
사망년 1698(숙종 24)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634(인조 12)∼1698(숙종 2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양경(亮卿)으로 성천 부사 김언(金線)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가 병자호란 때 적병과 싸운 공으로 중림 찰방(重林察訪)에 기용되었다. 1681년 헌납 박태손(朴泰遜)의 탄핵을 받아 한때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숙종 11년(1686) 전주 판관을 지내고, 같은해 왕의 특지(特旨)에 의해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 또 그해 53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 · 승지 등을 지냈다. 지평으로 재직할 때 시관(試官)으로 영남을 다녀온 후 궁방(宮房)의 폐해를 지적하였으며, 1695년에도 군대의 기강 확립과 관소의 비용절약을 건의하였다. 1698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임지에서 죽었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소 (金素)
기원기준 A.D
호 양졸와(養拙窩)
자 지백(知白)
출생년 1602(선조 35)
사망년 미상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國朝榜目, 韓國族譜大典(崔實光, 1989)
관련항목 김효건(金孝建)
이력사항
1602(선조 3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로서 김시설(金時說)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음보로 관직에 나가 좌랑을 지냈으며, 인조 13년(165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인조 22년(1644)에 성절사로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 참의 · 형조 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황해도 · 충청도의 관찰사등의 관직을 지냈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수 (金 )
기원기준 A.D
호 몽촌(夢村)
자 자앙(子茫)
출생년 1537(중종 32)
사망년 1615(광해군 7)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소의(昭懿)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몽촌집(夢村集)》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관련항목 박사제(朴思齊) 이광 (李洸) 고희(高曦)
이력사항
1537(중종 32)∼1615(광해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앙(子茫), 호는 몽촌(夢村)으로 첨지중추부사 김로(金魯)의 손자이며, 사재감 정 김홍도(金弘度)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원으로 있다가 선조 6년(157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그 이듬해 홍문관 정자 · 저작을 역임하고, 다시 예문관 봉교를 거쳐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다. 이어 정언 · 수찬 · 교검 · 지평 · 직강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고 주(注)를 붙였다. 그후 직제학 · 승지를 거쳐 1587년 평안도 관찰사에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부제학 · 대사헌 · 병조 판서 · 이조 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591년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며 1592년 11월 13일에 한성부 판윤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후 지충추부사 · 우참찬 · 호조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광해군 5년(1613) 손자 김비(金秘)가 적신들의 무고로 옥사하자 그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곧 병으로 죽었다.
일찍이 호조 판서로서 임진왜란 때 치적을 올려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1591년 홍여순(洪汝淳)이 간계를 꾸며 사류(士流)를 몰아내려고 그를 크게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죽음을 듣고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며, 저서로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전서) 김수녕 (金壽寧)
기원기준 A.D
호 소양당(素養堂)
자 이수(?馬)
출생년 1436(세종 18)
사망년 1473(성종 4)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문도(文悼)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관련항목
이력사항
1436(세종 18)∼1473(성종 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수(?馬), 호는 소양당(素養堂)으로 절충장군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53년 생원을 거쳐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 부수찬을 제수받은 뒤 병조 좌랑 · 헌납 · 응교 등을 지내고, 1458년부터 1462년까지 5도 체찰사(五道體察使)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그뒤 좌승지 · 예조 참의 · 공조 참의 · 대사간 · 호조 판서 · 공조 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으며, 문장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나 세조의 《주역구결(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는가 하면, 대사간으로 있을 때 성종에게 경연의 필요성을 주장한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역사서의 편찬에 많이 참여하여 1458년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 ·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또한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수동 (金壽童)
기원기준 A.D
호 만보당(晩保堂)
자 미수(眉馬)
출생년 1457(세조 3)
사망년 1512(중종 7)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문경(文敬)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관련항목
이력사항
1457(세조 3)∼1512(중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馬), 호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적(金?)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종 5년(1474) 생원(生員)이 되고, 1477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역임, 사헌부 장령에 올랐다.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시작하여 직제학 · 부제학에 올랐고 연산군 3년(1497) 승정원 부승지, 다음해 좌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全羅) · 경상(慶尙) · 경기도(京畿道)의 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5년(1499)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이조 참판 · 형조 판서 등을 거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겸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고 1504년 이조 판서, 다음해에 우찬성(右贊成)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다음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그는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으며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하에서도 총애를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으며, 때를 따라 신축성 있게 대처하여 임금에 대해서는 죄를 입지 않고 아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으며 청렴을 지켰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 5년(1510)에 영의정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양천구 신월동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었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시양,김시언 (金時讓,金時言)
기원기준 A.D
호 하담(荷潭)
자 자중(子仲)
출생년 1581(선조 14)
사망년 1643(인조 21)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충익(忠翼)
본 관 경주(慶州) 김(金)
저서/작품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荷潭集)》, 《부계기문(?溪記聞)》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관련항목 김휘(金徽) 신경유(申景裕) 정충신(鄭忠信) 민종도(閔宗道)
이력사항
1581(선조 14)∼1643(인조 21).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김시언(金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으로 좌참찬에 추증된 김인갑(金仁甲)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0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 세자시강원 주서를 거쳐 예조 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전라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그해 전라도 향시에서 출제한 시제(詩題)가 왕의 실정을 암시한 것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등용되어 예조 정랑 · 병조 정랑 · 수찬 ·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난을 진압하고, 1627년 경상 감사로 부임하였다.
경상 감사로 있을 때 경상좌도와 우도의 전결(田結)이 일치하지 않음을 상소하여 균일하게 정비하였으며, 1631년에는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부임하였다. 3개월 후에 8도 도원수로 임명되어 4도 체찰사를 겸하였고, 1634년 지충추부사에 서용되었다. 그후 호조 판서 · 세자 좌부빈객 · 강화 유수 · 판충추부사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회령의 향사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荷潭集)》 · 《부계기문(?溪記聞)》 등이 있다. 숙종 17년(1691) 시호로 충익(忠翼)을 하사받았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시헌 (金時獻)
기원기준 A.D
호 애헌(艾軒)
자 자징(子徵)
출생년 1560(명종 15)
사망년 1613(광해군 5)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尾錄, 國朝榜目
관련항목 김류(金濫) 이헌국(李憲國) 김덕기(金德基)
이력사항
1560(명종 15)∼1613(광해군 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으로 김제갑(金悌甲)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21년(158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 · 사간(司諫) · 전한(典翰) · 정언(正言) · 사인(舍人) · 겸보덕(兼輔德) ·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선조 30년(1597) 동부승지(同副承旨) · 우부승지(右副承旨) ·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에 올랐다. 그 후 대사간 · 우승지 · 좌승지등을 역임한 후 1602년 소모관(召募官)으로 경상도에 갔다가 호색(好色)한다 하여 유생들의 탄핵을 받고 오위 부사직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를 돌아보고 나서 임진왜란 후의 민심을 순무(巡撫)하고 성책(城柵)의 수축을 명했으며, 이듬해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4년 순천 군수, 다음해 병조 참의, 이어 좌승지, 1607년 양양 부사 · 병조 참판을 역임했다.
선조가 죽은 후 동지중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광해군 3년(1611) 예조 참판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역학(易學)에 밝았다.
한글(한자)이름 ★(안렴) 김언 (金 )
기원기준 A.D
호
자 여윤(汝潤)
출생년 1589(선조 22)
사망년 1636(인조 14)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민숙(愍肅)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589(선조 22)∼1636(인조 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윤(汝潤)으로 진사 김낙서(金洛瑞)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광해군 1년(1609)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7, 8년 후에야 비로소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임명되었는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흩어진 관병(官兵)을 이끌고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가서 관찰사홍명구(洪命耉)에게 예속시켰다. 또 의병을 소집하여 적을 방어하던 중 적의 대군을 만나 항복하라는 위협을 물리치고 계속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처음에 참판으로 추증되었다가 후에 다시 좌찬성으로 승급하여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숙(愍肅)이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유헌 (金裕憲)
기원기준 A.D
호 추산(秋山)
자 치문(穉問)
출생년 1781(정조 5)
사망년 1833(순조 33)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純祖實錄, 安東金氏書雲觀正公派譜(派宗中會, 1990)
관련항목 김회명(金會溟)
이력사항
1781(정조 5)∼1833(순조 3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문(穉問), 호는 추산(秋山)이며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순조 3년(1803)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가산(架山) · 영광(靈光)의 수령(守令)을 지냈으며 뒤에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한글(한자)이름 ★(부사) 김응해 (金應海)
기원기준 A.D
호
자 군서(君瑞)
출생년 1588(선조 21)
사망년 1666(현종 7)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무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耳溪集
관련항목
이력사항
1588(선조 21)∼1666(현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이다. 고려 시대의 시중을 지낸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김응하(金應河)의 아우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광해군 8년(1616)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 도총부도사 · 희천 군수 등을 지냈다. 1620년 강계 부사 · 부령 부사 · 인동 부사 · 정주 부사 등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청렴결백하게 민정을 보살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고 있었으며, 적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병사를 이끌고 저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실패하였다.
1642년 평안 병사로 임명되었다가 그 해 6월 서해안에 한선(漢船)이 출몰했는데도 막지 않았다는 청나라의 항의로 파직되었다. 1647년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에 올랐고, 효종 5년(1654)에는 총융사를 지냈다.
한글(한자)이름 ★(전서) 김익정 (金益精)
기원기준 A.D
호
자 자비(子斐)
출생년 미상
사망년 1436(세종 18)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436(세종 1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비(子斐)로서, 한성윤 김휴(金休)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태조 5년(1396)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에 배속되었다가 1409년 장령을 지냈다. 이 해 쇄권색(刷卷色)의 별감을 거쳐 직제학 · 우대언을 역임하였고, 세종 즉위 후에 충청 감사 전라 감사 · 경기 감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1422년 승정원 지신사로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헌 · 동지 총제를 지내고 인순부 윤 · 경창부 윤을 거쳐 이조 · 예조 · 형조의 참판을 두루 지냈다. 그후 1434년 9월 한성부 윤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임지로 떠나기 전에 죽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근검절약의 생활을 하였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자점 (金自點)
기원기준 A.D
호 낙서(洛西)
자 성지(成之)
출생년 1588(선조 21)
사망년 1651(효종 2)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國朝寶鑑, 韓國人物大系
관련항목 김집(金集) 김홍욱(金弘郁) 송준길(宋浚吉) 신면(申冕) 엄정구(嚴鼎耉) 원두표(元斗杓) 이경석(李景奭) 이광정(李光庭) 이상일(李尙逸) 이시방(李時昉) 이시해(李時楷) 이홍연(李弘淵) 임의백(任義伯) 장응일(張應一) 정지호(鄭之虎) 정태화(鄭太和) 송시열(宋時烈) 배시량(裵時亮) 이완(李浣) 임경업(林慶業) 지계최(池繼身) 인조(仁祖) 효종(孝宗)
이력사항
1588(선조 21)∼1651(효종 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강원도 관찰사김억령(金億齡)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함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벼슬이 병조 좌랑에까지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대북파에 의해 쫓겨났다. 광해군 14년(1622) 이귀(李貴) · 김류(金?) · 신경진(申景所) · 최명길(崔鳴吉) · 이괄(李适)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고 이듬해 3월 홍제원 밖 세검정에서 이귀 · 이괄과 함께 거사하여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綾陽君 : 후의 인조)을 추대하여 반정에 성공하였다. 반정에 성공한후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록되고 호조 좌랑을 거쳐 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당시 서인(西人)이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공서의 편에서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탄압하였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순검사 임진 수어사(巡檢事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 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이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토산(兎山) 싸움에서 참패한 죄로 전쟁이 끝나자 절도정배(絶島定配)당했다.
1639년 인조의 배려로 풀려 나와 다음해에 강화부 유수가 되고, 이어 손자 김세룡(金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고 인조 20년(1642) 병조 판서에 승진하여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의 봉함을 받았다. 원두표(元斗杓)와 세력다툼을 벌여 공서(功西)가 양분되자 낙당(洛黨)의 영수로서 반대파를 탄압하였다. 이듬해 판의금부사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청(淸)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승진되고 1644년 좌의정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646년 인조(仁祖)가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죽이려는 내심을 간파하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약을 투입한 뒤 그 혐의를 강빈에게 미루어 죽였으며,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유배보내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 등을 등용하여 북벌(北伐)을 꾀하고, 그를 파직시켰다. 다음해 그는 유배지인 홍천(洪川)에서 심복인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음과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에 청(淸)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溟)의 연호를 쓴 사실을 청(淸)에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크게 의심하고 대군(大軍)을 보내 진부(眞否)를 물었으나 효종(孝宗)의 기민한 수습으로 무마되었다. 결국 그의 반역행위가 드러나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가 1651년 아들 김익(金?)의 역모가 들어나 역모죄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였다. 그가 마포구 성산동 풀뭇골에서 병기(兵器)를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자행 (金自行)
기원기준 A.D
호
자 안이(安而)
출생년 1412(태종 12)
사망년 1489(성종 20)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石陵世蹟(筆寫本), 서울城廓(서울特別市, 1976), 安東金氏書雲觀正公派譜(派宗中會, 1990)
관련항목 김희수(金希壽)
이력사항
1412(태종 12)∼1489(성종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안이(安而)로 서운관 정(書雲觀正) 김완(金緩)의 손자이며 집의(執義) 김질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11년(1429)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소문전직장(昭文殿直長)에 특배(特拜)되고 이어 해주 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 지평(持平) ·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다음 영흥(永興) · 정평(定平) 양 도호부사(兩都護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다시 외직인 성주(星州) · 나주(羅州) · 광주 목사(廣州牧使)를 지내면서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그뒤 이조 참의 · 황해도 관찰사 · 예조 참의를 지내고 이어 강원도 관찰사 ·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문종(文宗) 1년(1451)에 서울 사직단(社稷壇) 북쪽 도성(都城)이 무너진 것을 이명민(李明敏)과 함께 도성수축(都城修築) 감독관이 되어 경기 · 충청 · 전라도의 선군(船軍)을 1회에 1,000~2,000명씩 동원하여 도성 수축에 공을 세웠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작 (金殯)
기원기준 A.D
호 상곡(相谷)
자 위경(衛卿)
출생년 1427(세종 9)
사망년 1488(성종 19)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효소(孝昭)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관련항목
이력사항
1427(세종 9)∼1488(성종 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으로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9년(1447) 생원(生員)이 되고, 단종 2년(1454)에 문음(門蔭)으로 선공감 녹사(繕工監錄事)에 이어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이 되었다. 세조 4년(1458) 통례원 봉례랑(通禮院奉禮郞)이 되고, 세조 8년(1462)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이 되었다. 1464년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경기도 여러 읍의 옥사(獄事) 관리실태를 조사 보고하는데 공헌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성종 8년(1477)에는 첨정(僉正)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뒤 도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성종 13년(1482)에는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484년에는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8년(1487)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제갑 (金悌甲)
기원기준 A.D
호 의재(毅齋)
자 순초(順初)
출생년 1525(중종 20)
사망년 1592(선조 25)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문숙(文肅)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名世叢攷,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김시헌 (金時獻)
이력사항
1525(중종 20)∼1592(선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로 진사(進士) 김석(金錫)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8년(1553)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다음 1555년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1558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선조 6년(1573)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선조 14년(1581)에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에 우승지(右承旨)로서 도승지(都承旨)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 ·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지역 국경방어강화책의 일환으로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이 많은 문관(文官)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의 군사가 원주(原州)를 침공하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영원산성(?原山城)에서 싸우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李氏) ·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이조 판서 겸 경연(吏曹判書兼經筵) ·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의금부사(義禁府事) · 성균관사(成均館事) ·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 괴산(槐山)의 화엄서원(華嚴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한글(한자)이름 ★(안렴) 김주 (金澍)
기원기준 A.D
호 우암(寓菴)
자 응림(應霖)
출생년 1512(중종 7)
사망년 1563(명종 18)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문단(文端)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우암유집(寓菴遺集)》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朝鮮人物號譜,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이양원(李陽元) 김구 (金構) 이언강 (李彦綱)
이력사항
1512(중종 7)∼1563(명종 1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으로 안원군(安原君) 김공량(金公亮)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중종(中宗) 26년(1531)에 진사(進士)가 되고, 중종(中宗) 34년(1539)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수석으로 급제하였으며 1544년에는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뒤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한 후 전라도 관찰사및 개성 유수 · 대사헌을 역임하고 예조 참판이 되었다. 명종(明宗) 18년(1563)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溟)에 들어가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이인임(李仁任)이 아닌 이자춘(李子春)이라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연경(燕京) 관사(館舍)에서 병으로 죽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등과 우의가 두터웠다. 선조(宣祖) 23년(1590)에 광국공신(光國功臣) 화산군(花山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저서로 《우암유집(寓菴遺集)》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부사) 김중기 (金重器)
기원기준 A.D
호
자 대기(大器)
출생년 미상
사망년 1735(영조 11)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무신
시 호
본 관
저서/작품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관련항목 이우항(李宇恒)
이력사항
?∼1735(영조 11). 자는 대기(大器)로서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무직(武職)을 거친 후 숙종 29년(1703)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사가 되었다가 1706년에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그가 총융사로 임명되었을 당시에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기왕 의존해 오던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를 중심으로 한 수도(首都) 방어체제보다는 도성(都城)이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수축하여 대비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결국 숙종 37년(1711) 2월 총융사인 그가 직접 왕심(往審)하고 온조구기(溫祚舊基)로 알려진 구성기(舊城基)를 중심으로 산성수축(山城修築)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민진후(閔鎭厚)를 북한 구관당상(北漢句管堂上)에 임명하고 총융사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겸하고 있던 그로 하여금 포도대장 직을 교체해주고 오로지 북한산성 수축의 감독(監督)을 전담하도록 하되 3군문(軍門)의 재력(財力)을 동원하여 그 해 10월에 일단 축성역(築城役)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끝난 후 12월에 장령(掌令) 홍우녕(洪禹寧)이 왕의 허락없이 북한성대(北漢城臺)에 집을 짓고 군기(軍器)를 조비(措備)한다는 이유로 영남면포(嶺南綿布) 150동(同)을 비국(備局)으로부터 대출(貸出)하여 이를 왜관(倭館)에 전매(轉賣)하여 거만(巨萬)을 식리(殖利)했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 결국 이듬해 10월 병을 앓아 총융사를 사임했다가 1713년 10월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숙종 45년(1719)에는 통제사(統制使)로 나아갔으나 여기서도 그의 복심과 결탁하여 몇 천금(千金)의 재화(財貨)를 출급(出給)하여 헤아릴 수 없는 식리(殖利)를 했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숙종이 끝내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무장으로 국왕의 신임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경종(景宗)이 즉위한 1721년 7월 7일에 다시 관직(官職)으로 돌아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다시 돌아오고, 1722년 10월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듬해 2월에는 다시 한성부 좌윤 · 어영대장 · 훈련대장을 역임하고, 영조(英祖) 즉위년에는 다시 포도대장 ·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소론파(少論派)로 몰려 삭탈관작되었다.
영조 3년(1727) 노론(老論)이 물러난 정미환국(丁未換局) 때 다시 총융사(摠戎使)로 기용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座)의 난(亂)이 일어나자 총융사(摠戎使) 겸 순토사(巡討使)로 임명되었으나, 반란군 주동자의 한 사람인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아우의 처남이라 하여 미온적 태도를 취하다가 의금부에 오래도록 구금되었다. 그뒤 석방하려는 주장도 있었으나 감옥의 벽을 뚫고 내왕한 혐의를 받아 처형되었고, 총융사(摠戎使)가 반군(叛軍)과 짝한데 충격을 받은 영조(英祖)는 도성(都城) 수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진 (金振)
기원기준 A.D
호 낙봉(駱峯)
자 군옥(君玉)
출생년 1603(선조 36)
사망년 1669(현종 10)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仁祖實錄, 石陵世蹟(筆寫本)
관련항목
이력사항
1603(선조 36)∼1669(현종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옥(君玉) 호는 낙봉(駱峯)이며 아버지는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김성립(金誠立), 어머니는 여류시인(女流詩人) 허난설헌(許蘭雪軒)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인조 13년(163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전랑(銓郞) · 검상(檢詳) · 사인(舍人)을 역임한 다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질 (金銷)
기원기준 A.D
호 쌍곡(雙谷)
자 가안(可安)
출생년 1422(세종 4)
사망년 1478(성종 9)
시 대 조선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문정(文靖)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名世叢攷, 朝鮮人物號譜
관련항목 박숙진(朴叔秦)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어세겸(魚世謙) 유응부(兪應孚) 정창손(鄭昌孫)
이력사항
1422(세종 4)∼1478(성종 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며 세조(世祖) 때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사위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문음(門蔭)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해 있다가 성균관(成均館)에 수학(修學)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으며 문종(文宗) 즉위년(145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에 이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이 되어 성삼문(成三問) · 최항(崔恒) ·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이 무렵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위해 거사를 도모하다가 발각이 두려워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世祖)에게 고변(告變)하여(1456)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승진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추봉(追封)되어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황해(黃海) ·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가 되고 세조 7년(1461)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세조 9년(1463)에는 공조 판서에 이어 병조 · 형조 판서를 거쳐 세조 12년(1466)에는 우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세조 14년(1468)에는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는데 세조(世祖)가 죽자 한명회(韓明澮) ·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주관하였다.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진봉되었고 1474년에는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로 명(溟)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찬 (金瓚)
기원기준 A.D
호 눌암(訥菴)
자 숙진(叔珍)
출생년 1543(중종 38)
사망년 1599(선조 32)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효헌(孝獻)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상용 (金尙容)
이력사항
1543(중종 38)∼1599(선조 3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 김언심(金彦沈)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즉위년(1567)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570년에는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대교(待敎) · 전적(典籍) · 형조 정랑(刑曹正郞) · 검상(檢詳) ·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지평(持平) · 집의(執義) · 정언(正言) · 헌납(獻納) · 사간(司諫) · 수찬(修撰) · 교리(校理) · 응교(應敎) 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한 다음 1574년에는 평안도 순무사(平安道巡撫使)로 나갔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典翰) · 직제학 · 승지 · 대사간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왕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이듬해 체찰부사(體察副使) · 양 호조 도사(兩湖調度使)가 되어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에는 접반사(接伴使)로서 명(溟)의 원군(援軍)을 인도, 강화회담에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부터 예조 판서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대사헌 · 이조 판서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승진되었다.
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에 밝았고 외교적인 수완이 능하여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이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치 (金緻)
기원기준 A.D
호 남봉(南峰)심곡(深谷)
자 사정(士精)
출생년 1577(선조 10)
사망년 1625(인조 3)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심곡비결(深谷秘訣)》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名世叢攷, 嶠南誌
관련항목 김득신 (金得臣)
이력사항
1577(선조 10)∼1625(인조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또는 심곡(深谷)으로 부사(府使) 김시회(金時晦)의 아들로서 중부(仲父)인 상락군(上洛君) 김시민(金時敏)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 30년(1597)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1608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 정(司僕寺正) · 이조 참의(吏曹參議) · 동부승지 ·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낸 다음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 吏曹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모의했으며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의 폭정(暴政)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때 심기원(沈器遠)과 내통, 벼슬길에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에 몰려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나 재물을 탐내어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秘訣)》이 있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회명 (金會溟)
기원기준 A.D
호 석공(石公)
자 광지(光之)
출생년 1804(순조 4)
사망년 1860(철종 11)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憲宗實錄, 安東金氏書雲觀正公派譜(派宗中會, 1990)
관련항목
이력사항
1804(순조 4)∼1860(철종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광지(光之), 호는 석공(石公)이며 좌승지(左承旨) 김유헌(金裕憲)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헌종 3년(1837)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참봉(參奉)이 되었다. 헌종 10년(1844) 증광문과(增廣文科)를 보아 급제한 다음 자산(慈山) ·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내고 뒤에 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되었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회상 (金會祥)
기원기준 A.D
호
자 치준(致浚)
출생년 1838(헌종 4)
사망년 1906(광무 10)
시 대 조선후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安東金氏書雲觀正公派譜
관련항목
이력사항
1838(헌종 4)∼1906(광무 1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준(致浚)이며 김정헌(金鼎憲)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음직(蔭職)으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한글(한자)이름 ★(익원) 김효건 (金孝建)
기원기준 A.D
호 경현옹(警絃翁)
자 선술(善述)
출생년 1584(선조 17)
사망년 1666(현종 7)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韓國名門統譜
관련항목
이력사항
1584(선조 17)∼1666(현종 7). 본관은 안동, 자는 선술(善述), 호는 경현옹(警絃翁) 또는 경옹(警翁)이며 현감(縣監) 김근(金瑾)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광해군 1년(160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인조 2년(1624)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장령(掌令)으로 재직할 때 함경 감사 목장흠(睦長欽)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절목(廢母節目) 작성문제를 변명하다가 흥해 군수(興海郡守)로 체차(遞差)되었다. 인조 12년(1634)에는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廢母)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던 문제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왕의 양해를 받았다.
효종 3년(1652)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재직할 때 당시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소(金素)와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성시(李聖時), 북청 판관(北靑判官) 김이경(金以鏡) 등과 함께 무기(武器) 수리에 있어 태만했다는 이유로 병조(兵曹)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뒤에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한글(한자)이름 ★(제학) 김휘 (金徽)
기원기준 A.D
호 사휴정(四休亭)
자 돈미(敦美)
출생년 1607(선조 40)
사망년 1677(숙종 3)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관련항목
이력사항
1607(선조 40)∼1677(숙종 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 또는 만은(晩隱)이며 판충추부사(判中樞府事) 김시양(金時讓)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인조 20년(164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봉교(奉敎)로 임명되었으며 인조 24년(1446)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자 정언(正言)으로 재직하면서 사사(賜死)의 경위를 규명하라는 일반 사림의 자격으로 소(疏)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효종 즉위년(1649) 부수찬(副修撰)에 기용되고 이조 좌랑(吏曹佐郞) · 이조 정랑(吏曹正郞) · 교리(校理) · 응교(應敎) · 헌납(獻納) · 사간(司諫) ·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顯宗) 연간에는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 함경도 관찰사에 이어 현종 6년(1665)에는 경상도 관찰사에 이어 강화 유수(江華留守) · 황해도 관찰사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에는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당했다가 현종 9년(1668)에 형조 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숙종 1년(1675)에는 이조 판서를 지내고 이듬해에는 예조 판서 · 개경 유수(開京留守)를 역임하였다. 그림을 잘 그렸다.
한글(한자)이름 ★(서운) 김희수 (金希壽)
기원기준 A.D
호 유연재(悠然齋)
자 몽정(夢禎)
출생년 1475(성종 6)
사망년 1527(중종 22)
시 대 조선중기
신분/직업 문신
시 호
본 관 안동(安東) 김(金)
저서/작품 〈계주문(戒酒文)〉(글씨), 〈영상김수동비(領相金壽童碑)〉(글씨), 〈영상성희안비(領相成希顔碑)〉(글씨)
참고문헌 中宗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名世叢攷
관련항목 김노 (金魯)
이력사항
1475(성종 6)∼1527(중종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로 악정(樂正) 김숙연(金叔演)의 아들이며 관찰사김자행(金自行)의 손자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2년(1507)에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이듬해에 권발(權?) · 이희증(李希曾) · 김영(金瑛) ·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의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청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또 왕이 덕치정치(德治政治)를 하자면 신하의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중종 4년(1509)에는 정자(正字) · 박사(博士)에 이어 지평(持平) · 검상(檢詳) 등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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