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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땅 청천강 입구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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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19 07:38 조회1,90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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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행장>

***1300년경 지어진 듯,

***1350년 손자 김영후의 집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행장이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함, 2월에 안진이 발문을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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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丁未)년(서기1247년)에 공(公)은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승진되었다.  그때에 몽고병(蒙古兵)이 침공(侵攻)해 들어오니 공(公)은 여러 성주(城主)에게 명령하여 "위도(韋島=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保全)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섬은 넓이가 십여리가 되니 조수(潮水)가 자주 드나들어 농경(農耕)을 할 수가 없어 공(公)은 사람들을 동원(動員)하여 제방(堤防)을 쌓게 하니 그 위는 수레가 능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을 개간(開墾)시켜 씨를 뿌려 농사를 짓게 하니 당시 백성들이 고생을 하다가 가을이 되니 만곡(萬穀)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한편 몽고병들이 계속 주둔(駐屯)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그 곡식으로 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또 한편 그 섬에는 우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육지(陸地)까지 식수(食水)를 길러 갔다가 왕왕 몽고병들에게 포로(捕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공(公)은 다시 뚝을 견고(堅固)하게 쌓아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것을 막고 비가 올 때에 물을 가두어서 큰 저수지(貯水池)를 만드니 여름에는 그 물을 길어다 먹고 겨울에는 어름을 뚫고 물을 쓸 수 있게 하니 이로부터 육지까지 물을 길러 가는 노고(勞苦)와 몽고병에게 붙들려 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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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정주 (평안북도 청천강 입구)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서울에서 경의선(京義線)을 타고 서른 네 번째 역을 지나면 운전(雲田), 고읍(古邑) 다음에 정주(定州)역이 나타난다. 한양서 북으로 천리길을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가야 하던 옛 평안도 정원(定遠) 땅의 군청 소재지.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슬금슬금 기어내리던 북쪽의 독장산(獨將山), 동으로는 봉명산(鳳鳴山), 가뭄때 기우제를 지내던 묘두산(猫頭山), 큰 돌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던 방호(防胡)고개, 서쪽으로는 임해산(臨海山)이 있어 곽산(郭山)가 경계를 이루고, 동남은 정족산(鼎足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기에 좋았다. 역시 그쪽으로 날망에 다섯 봉우리가 보이는 제석산(帝釋山)이 있었는데, 정주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오산(五山)이라 했다. 춘원(春園)이 오산학교 선생 시절 '제석산인'이라 자호한 것도 이 산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다. 서까래같이 굵은 뱀 한 마리가 살았다는 석가산(石假山)이 멀리 아련히 바라다보이는 서북쪽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이 '약천(藥泉)'이라 부르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고 바르면 피부병이 낫는다 해서 많은 부스럼장이들이 들끓었다.

정주의 동쪽으로는 달천(撻川)이 흘렀는데, 이 강은 구성(龜城)의 인산에서 발원해 남으로 흘러 봉명산 물줄기와 합류, 방호고개 밑을 꺾어 흐르다가 이윽고 정주 앞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다에는 고려적에 몽고군에게 쫓긴 김방경 장군이 피난해 숨었다는 위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양동 염전이 저녁 햇살 속에 가물가물 보였다.


(《창작과비평》 복간호, 1988.) ---李 東 洵

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여사의 회고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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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청천강 입구 평북 정주 앞바다에 있다는 위도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찾고 있는데, 찾을 수 없네요.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위도의 실 위치와 주변지리를 잘 정리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통일되면 안사연 산행과 여름캠프지로 최적입니다. 
위도 지도를 찾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