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1 (58세,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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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21 22:31 조회1,458회 댓글1건본문
(58세) 1398년 태조7
태조 013 07/01/11 (기미) 002
/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비로소 노비 변정 도감에서 일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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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비로소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에서 일을 보았다.
태조 013 07/02/30 (정미) 001
/ 회암사에 거둥하다. 동북면의 사시 대향으로 인한 강원도 회양 등지의 폐해를 줄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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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보고, 풍천(楓川)에 머물러서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불러 말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오몽을(吳蒙乙)이 상신(上申)한 배진(排鎭)하는 일은 염려는 되기는 하나 급한 일은 아니고, 회양(淮陽)·김화(金化)·금성(金城) 등 고을은 동북면(東北面)의 사시 대향(四時大享)으로 인하여, 사신(使臣)이 왕래하는 것이 월일(月日)이 많지 않은데, 조폐(凋弊)된다는 말은 대단히 한심하다. 사시 대향을 폐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하면 조폐를 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물으라.”
사형이 대답하였다.
“여러 고을이 본래 길 옆에 있어서 조폐한 지가 이미 오랩니다. 만일 심히 괴롭고 지대(支待)하기 어려운 일은 감면하고, 또 소신(小臣)과 여러 사절(使節)의 왕래하는 수를 줄이면 거의 소식(蘇息)될 것입니다.”
태조 013 07/03/01 (무신) 001
/ 소마동에 거가를 멈추고 김사형·남은 등과 창업할 때의 일을 담론하며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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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동(所磨洞)에 이르러 거가(車駕)를 머무르고,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과 더불어 잠저(潛邸) 때의 서로 친숙하던 정(情)과 개국(開國)하느라고 근로(勤勞)하던 일을 담론(談論)하며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행(行)하여 장단(長湍)에 이르러 응교(應敎) 이조(李慥)를 명해서 글을 지어 전조(前朝)의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의 묘(墓)에 치전(致奠)하게 하였다. 밤에 임금이 꿈에 시(詩)를 지었는데, 그 아래 연귀(聯句)는 이러 하였다.
“북소리와 종소리가 울리어 중외(中外)에 통하니,
정히 삼한(三韓) 만세(萬世)의 기지(基地)여라.”
태조 013 07/03/07 (갑인) 001
/ 조준에게 부임 인사를 하지 않은 강은과, 세자부의 책을 바꾸어내려 한 민안인이 탄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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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諫官)이 예문춘추관(藝文春秋官) 학사(學士) 강은(姜隱)과 전 교수관(敎授官) 민안인(閔安仁)을 탄핵하였다. 은(隱)은 새로 직임(職任)을 받고 당참(堂參)하는 날에, 홀로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만이 부(府)에 오르고 뒤에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부(府)에 앉았는데, 은(隱)이 다시 참례(參禮)를 행하지 않고 바로 좌차에 앉았다. 준(浚)이 경력(經歷) 우간의(右諫議) 윤사수(尹思修)에게 이르기를, ---
태조 013 07/03/17 (갑자) 001
/ 제주 축마 별감 김계란이 양마 8필을 바치다. 김사형에게 말 한 필을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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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 축마 별감(畜馬別監) 김계란(金桂蘭)이 좋은 말 8필을 와서 바쳤으므로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말 한 필을 내려 주었다.
태조 013 07/04/26 (임인) 002
/ 좌·우 정승 조준과 김사형에게 신도 팔경 병풍 한 면씩을 주다. 정도전의 팔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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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에게 신도 팔경(新都八景)의 병풍(屛風) 한 면(面)씩을 주었다.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이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는데, ---
태조 014 07/05#16 (신묘) 001
/ 임금이 궁성 동문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신들을 힐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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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이 휴가를 얻어 집에 있었는데, 홀로 정승 조준이 임금의 명령을 들었으므로 응답할 수가 없어서 다만 말하였다.
태조 014 07/05#18 (계사) 001
/ 정도전 이지란 설장수 성석린 등을 불러 위로하고 잔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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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양정(涼亭)에 술자리를 준비하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참찬문하(參贊門下) 이지란·월성군(月城君) 설장수(偰長壽)·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을 불러서 명령을 받들어 사신으로 갔던 일을 위로했는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영삼사(領三司) 권중화(權仲和)·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잔치에 배석(陪席)하여 한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태조 014 07/06/01 (을사) 001
/ 아조에 백관들이 정열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대신들을 서루에서 불러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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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百官)들이 자리에 나아와서 반열(班列)을 정제했는데, 임금이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성군(宜城君) 남은을 서루(西樓)로 불렀다. 조준 등이 옹주(翁主)·택주(宅主)의 여관(女官) 녹봉(祿俸)을 그전대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미 이를 중지시켰으니 고칠 수 없다.”
조준 등이 다시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398년(태조 7),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권중화(權仲和)·김희선(金希善) 등이 의약서(醫藥書)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총 30권. 1398년 6월 권근이 서문을 썼다.
양촌선생문집 제17권 /서류(序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서 권근(權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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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인성(仁聖)한 자품으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시고, 널리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생각을 미치지 않는 데가 없이 하였으나, 매양 가난한 백성이 병이 나도 치료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몹시 측은하게 여겼었다. 좌정승 평양백(左政丞平壤伯) 조공 준(趙公浚)과 우정승 상락백(右政丞上洛伯)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위로 성상의 마음을 체득하고 ‘서울에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노비(奴婢)를 지급하여 향약(鄕藥)을 채취시켜서, 약을 만들어 널리 펴서 백성이 편히 쓸 수 있게 하기’를 주청(奏請)하매, 중추(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이 그 일을 도맡았었다.
각 도(各道)에도 또한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고 교수(敎授)를 나누어 보내어 이와 같이 약을 쓰게 하여 영구히 그 혜택을 입게 하였다. 또 그 방문에 미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명관(特命官) 권공(權公)ㆍ약국관(藥局官)과 함께 모든 방문을 다시 상고하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험한 방문을 채집하여 부문(部門)으로 분류 편집하여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라 이름하고,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부록(附錄)하였는데,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있을 때 공장(工匠)을 모아 인쇄하여 널리 전파(傳播)하니, ---
홍무 31년 무인 여름 6월 하한(下澣)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1398년(태조 7) 조준(趙浚)·권중화(權仲和)·김희선(金希善)·김사형(金士衡) 등이 편찬한 의약서(醫藥書).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1399년(정종 1)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망실되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종 때 발간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388증(症)과 2,803방(方)을 인용하였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을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양촌집 陽村集≫ 권17에 당시의 석학인 권근(權近)이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문·발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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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014 07/07/08 (신사) 002
/ 조준·김사형·정도전이 신귀생의 난동을 막은 내시 조순을 남은의 집에서 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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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이 환자(宦者) 조순(曹恂)을 남은(南誾)의 집에서 접대하고 모두 말 1필을 증여(贈與)하였다. 조순은 부름을 받은 후로부터 더욱 임금의 사랑함을 얻게 되었다. 임금이 신귀생(申貴生)을 위하여 연회를 개최한 날에 귀생이 술이 취하여 칼을 빼고자 하는데, 조순이 즉시 이를 말렸으니 조준 등이 이 일로써 조순을 접대한 것이었다.
태조 014 07/07/11 (갑신) 001
/ 조준을 비방한 김부를 목베다. 요동 공략 문제로 조준 김사형과 남은 정도전 일파 간에 알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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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남은이 정도전과 더불어 친근하여 몰래 요동(遼東)을 공격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남은이 임금에게 비밀히 말하였다.
“조준과 김사형이 매양 이의(異議)가 있습니다.”
때마침 전시(田時)가 능실(陵室)의 일로써 체포되어 있는데, 유원정(柳爰廷)·조화(趙和)·신효창(申孝昌)에게 말이 미치게 되었다. 유원정은 조준과 서로 후하게 지내는 사람이고, 조화는 그의 조카이며, 신효창은 김사형의 외생(外甥)인 까닭으로, 전시를 국문(鞫問)하여 그들에게 관련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전시가 언급(言及)함이 없었다. 임금이 남은은 일찍이 친근하고 신임하는 사람임으로써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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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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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변정도감, 드라마 <신돈>에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좌정승 익원공 선조님의 업적과 연보가 정확하게 밝혀 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