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川沙 金宗德의 문학과사상 08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4-24 16:11 조회1,731회 댓글0건

본문



川沙 金宗德의 문학과사상 08







학술대회장에서 보고 들은 바는 있지만, 사상과 철학이라는 것은 함부로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사견을 배제하고 [川沙 金宗德의 文學과 思想] 학술대회 논문집에 수록된 주요부분과 저술설명 위주로 발췌해서 타이핑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 천사 김종덕선생의 學問과 著述 --- 金洪永 (계명한문학회 회원)





<제2기> 1760년-1781년



천사의 연보 가운데 37세 때부터 대산이 세상을 떠난 58세까지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 그의 학문적 稟疑에 대한 대산의 답변, 그리고 사제간의 학문적 토론과 관련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대산과의 끊임없는 질의와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심화시키면서 자가의 학문을 세워 나갔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공부를 통하여 천사는 이미 이 시기에 考證, 孔門一統 등의 저술을 남겼고, 대산의 명을 받은 그의 손자 李秉運의 집지를 받았으며,



후산 이종수, 번암 채제공, 회병 신체인, 노애 유도원, 입재 정종로, 백불암 최흥원, 남야 박손경, 마옹 조진도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산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인 50대 후반에 천사는 대산 문하의 嫡傳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히면서 크게 스승의 허여를 받았는데, 이 점은 다음 글을 통하여 족히 짐작할 수 있다.



< 생 략 >









<제3기> 1781년-1797년



한편 대산의 문하에 출입하던 20여 년이 천사가 스승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대성시킨 시기라고 한다면 대산이 세상을 떠난 1781년 이후 한 동안은 천사가 先師 대산의 업적과 학문을 발양하는데 바친 시기라고 할 만하다.



천사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大山書堂에서 문집을 교정한 이래 [大山先生遺事] [通慕錄] [師門敍述], 대산 선생의 문집과 연보 등을 교정하고 문집을 重校하는 한편,



[大山先生請享疏本]을 짓는 등 스승의 학문적 업적을 闡發(천발)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그의 각별하고 드높은 경모심의 표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사가 스승의 학문을 발향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 기간은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는 강학과 저술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학문을 더욱더 확고하게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바쳤던 시기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 시기에 천사는 대산 몰후에 실질적으로 대산의 학맥을 영도하면서

1782 釋學正贓 (석학정장)

1782 聖學正路 (성학정로)

1784 政本 (정본)

1790 聖學入門 (성학입문)

1796 草廬問答 (초려문답) 등

방대한 저술을 남기는 한편,



이야순, 정필규, 류송조, 이병운, 이병원, 서활, 조우?, 김청진, 박진원 등 130여 명에 이르는 많은 문도를 양성했으며,





특히 천사가 64세때인 1787년 마을 뒤 골짜기에 세웠던 孺子亭은 그가 정조21년 74세를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이 시대 영남학맥의 구심처 가운데 하나였다.











2.2 학문적 위상



천사가 이룩한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 대하여 식견이 좁고 얕은 후학으로서 쉽게 말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영남의 유림이 조선후기 영남학맥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대산, 정재와 더불어 천사를 함께 모시는 ?강서원을 세우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원을 건립하려던 기금으로 이른 바 湖·沙·坪 즉 대산·천사·정재의 저술인 [약중편] [성학정로] [주절휘요]를 동시 병간했던 사실을 통해서 조선후기 영남학맥에서 천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충분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김항용 -

▣ 김정중 -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은회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