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5 (62세, 14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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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4-27 21:04 조회1,650회 댓글0건본문
(62세) 1402년 태종2
태종 003 02/01/17 (경자) 001
/ 하윤·김사형·이무 등으로 가례색 제조를 삼다. 하윤과 민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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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 등으로 가례색 제조(嘉禮色提調)를 삼았다. ---
태종 003 02/01/20 (계묘) 002
/ 좌정승 김사형이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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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이 병으로 사직(辭職)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종 003 02/04/16 (무진) 002
/ 만산군 임팔라실리의 무리를 받아들이기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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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라실리 등을 받아들이었다.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 등이 아뢰기를,
“지금 허용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한다면 굶주림에 다달아 반드시 해를 끼칠 것입니다. 비록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윤의 의논에 좇았다. 처음에 서북면 찰리사(西北面察理使)가 보고하기를,
태종 003 02/04/19 (신미) 001
/ 좌정승 김사형이 각사를 이끌고 원자 책봉을 하례하였으나 받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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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김사형(金士衡)이 각사(各司)를 거느리고 원자(元子)의 책봉을 하례(賀禮)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 003 02/06/01 (계축) 002
/ 중국의 내란과 관련, 하윤 등과 서북면에 성 쌓는 문제를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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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형(金士衡)이 말하기를,
“삼국(三國)이 전쟁할 때에 모두 목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은 매우 어지럽고 우리 나라는 무사하오니, 이때에 성을 쌓아야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가을이 되면 사신을 보내어 쌓도록 하겠다.”
태종 003 02/06/01 (계축) 003
/ 김사형 등에게 일본 사신들에 대한 의전 절차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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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김사형 등에게 묻기를,
“의정부에서 일본의 사신인 중[僧]에게 잔치를 베푸려고 하는데 그 좌차(坐次)를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이무가 대답하기를, “일본 중을 남쪽 줄[南行]에 앉히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승(政丞)도 또한 대작(對酌)하는가?”
하니, 김사형이 대답하기를, “정승이 대작(對酌)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근래에 중국 사신에게는 응대(應對)할 여가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서 대접하였습니다. 만일에 그전처럼 하지 않는다면, 중[僧]이 ‘우리들을 대접하는 것이 그전과 같지 않으니, 우리들은 가겠습니다.’고 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였다. “정승 이하가 대작함이 옳겠다.”
태종 003 02/06/26 (무인) 001
/ 조회를 마치고 대신들을 불러 농사의 풍흉과 전함의 허실을 의논하다
--------------------------------------------------------------------조회가 끝나자 특별히 영의정부사 이거이(李居易)·영사평부사 하윤(河崙)·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 조영무(趙英茂) 등을 불러 대전(大殿)에 오르게 하고 김사형에게 눈을 돌려 위문(慰問)하였으니, 김사형이 병(病)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농사의 풍흉(豐凶)과 전함(戰艦)의 허실(虛實)을 의논하였다.
태종 004 02/07/09 (경인) 001 / 정승 김사형과 이무가 비온 것을 하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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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었다.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가 대궐에 나아가 하례(賀禮)하고 약주를 들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인하여 의정부에 술을 내려 주었다.
태종 004 02/07/11 (임진) 003
/ 사평부 영사 하윤 등에게 신도로 돌아가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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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하윤(河崙)·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를 불러 신도(新都)로 돌아갈 것의 가부(可否)를 의논하였다. ---문무 각사(文武各司)에서 진언하였는데, 혹은 신도로 돌아가야 된다고 말하고, 혹은 구도(舊都)에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혹은 도읍을 무악(毋岳)으로 옮겨야 된다고 말하여, 의논이 분운(紛紜)하였다. 삼부(三府)에서 의논하여 아뢰었는데, 구도에 있는 것이 가하고, 신도로 돌아가는 것은 불편하다 하였다. 임금이 신도는 태상왕께서 창건하신 땅이고, 구도는 인심이 편안하게 여긴다고 하여, 뜻이 결단되지 못하였다. 삼부(三府)의 의논을 보고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여겨 가까운 신하에게 묻기를,
---하윤·김사형·이무·조영무 등이 도읍을 정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해가 반나절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하고 파하였다.
○지도를 만든 것이 대개 소략(疏略)한데, 오직 원나라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갖춰졌으며,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 실렸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4년(태종 2, 1402)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본관) 김공 사형(金公士衡)ㆍ우정승 단양(丹陽 본관) 이공 무(李公茂)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薈)를 시켜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게 한 다음에 요하의 동쪽에 있는 조선과 일본을 넣어 역대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만들었다. 8월 권근이 지를 썼다.
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의 지 ---권근(權近)
태종 004 02/09/11 (신묘) 002
/ 중신들과 동서북면의 양전(量田)을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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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정승 김사형(金士衡)·우정승 이무(李茂)·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조영무(趙英茂)와 더불어 동서북면(東西北面)의 양전(量田)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다. 사형이 말하기를,
“전일에 내리신 간원(諫院)의 장소(狀疏)는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태종 004 02/10/04 (갑인) 002
/ 하등극사를 자임한 하윤의 좌정승 임명과 기타 주요 관직의 인사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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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金士衡)으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하윤(河崙)으로 좌정승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이직(李稷)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권근(權近)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우정승 이무(李茂)를 보내어 등극(登極)을 하례(賀禮)하고자 하여, 하윤·김사형·이무를 불러 말하기를, “우정승은 본래 병이 있어 원행(遠行)하기가 어려운데, 어떠한가?”
하였다. 사형이 말하기를, “신도 또한 병이 있사온데, 다만 상감(上鑑)을 두려워하여 감히 사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崙)이 말하기를, “정승들이 모두 병이 있으니, 신이 가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서 울고, 윤도 또한 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으로 좌정승을 삼았으니, 등극을 하례하기 위함이었다.
태종 004 02/11/18 (정유) 003
/ 김사형을 상락 부원군으로, 이저를 겸 판승추부사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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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金士衡)으로 상락 부원군(上落府院君)을, 이저(李佇)로 겸 판승추부사(兼判承樞府事)를 삼고, 곽충보(郭忠輔)에게 말 1필을 내려 주고, 또 안우세(安遇世)에게 말과 옷을 내려 주었으며, 박순(朴淳)의 집에 종이 1백 권(卷)과 쌀·콩 아울러 1백 석을 내려 주었다.
<시대상황>
○권근(權近),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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