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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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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4-29 07:49 조회1,6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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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초희는 바깥사랑채 앞에 닿자 섬돌 위의 신발부터 살폈다. 큰 오라버니는 강학이 파하면 해시계 영침(影針)처럼 정확히 돌아왔으나 술을 좋아하고, 시 벗이 많은 작은 오라버니는 귀가 시간이 불규칙했다. 어제도 작은 오라버니는 술시가 넘어 돌아왔다. 그러나 그 시간에는 바깥사랑에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퇴청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초희가 오라버니들에게 글을 배우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초희는 큰 오라버니만 있으면 그냥 돌아갈 참이었다. 경학(經學)은 큰 오라버니에게, 사장(辭章)은 작은 오라버니에게 번갈아 배웠는데 오늘은 시경을 읽는 날이었다.
 다행히 작은 오라버니의 신발이 있었고, 문밖으로 두 사람이 송시(宋詩)를 화창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학(講學)에서 돌아오면 오라버니들은 일과처럼 송시(宋詩)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기척을 내자, 작은 오라버니가 문을 열었다. 초희는 두 오라버니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초희가 두 오라버니가 마주 앉은 서안 한쪽 끝에 서책을 얹고 앉기가 무섭게 작은 오라버니가 마치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 시경(詩經)을 배운데 까지 암송하여 보아라 』
 초희는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책만 앞에 두면 공연히 누이에게 엄격해지는 것은 작은 오라버니의 버릇이었다. 이번에는 아마 어제 늦은 귀가를 호도 하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초희는 서안 앞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관저(關雎)시부터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성은 차분하면서도 낭랑하고 청아했다. 암송은 소남(召南) 패풍(佩風)에 이르러도 한번도 마침 없이 이어졌다. 가끔, 좋구나! 라는 두 오라버니의 찬탄이 들렸다. 암송이 왕풍(王風)을 거쳐 정풍(鄭風)에 이르렀을 때 초희의 성색에 아연 활기가 돋았다. 정풍을 음란한 노래라고 논어에서는 비판하고 있다고 작은 오라버니가 말했지만 초희가 느끼기에는 정풍은 아름답고 절절한 사랑노래였다. 그녀는 특히 자금(子衿)을 좋아했다. 
  그러나 초희는 자금을 암송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밖에서 기척이 났고 행랑아범의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큰 오라버니가 문을 열었다.
  『 무슨 일인가? 』
 행랑아범은 마치 자신이 글 읽는 그들을 방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송구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나으리께서 습자(習字)한 서책을 갖고 안사랑에 들라하십니다, 손님이 오셨다고… 』
 아버님이 벌써? 초희는 당황했다. 퇴청이 평소보다 일렀던 것이다. 아버지가 벌써 안사랑에 있다면 바깥사랑을 거쳐갈 때 초희의 시경 암송을 들었을 터였다. 오라버니들은 “또 어떤 서도명인(書道名人)을 초대하신 모양이로구먼” 하고 중얼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 의관을 갖추었다. 초희는 어두운 안색으로 펼쳐놓은 서책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아는 왜 글을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 오라버니들이 습자 책을 옆에 끼고 섬돌에서 신을 신고 나서는데 행랑아범이 다시 말했다.
  『 아기씨는 왜 그러고 있습니까? 』
  『 나도? 』
  『 네, 함께 모시고 오랍시는뎁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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