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29 (67세 별세, 14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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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02 22:34 조회1,678회 댓글0건본문
(67세) 1407년 태종7
태종 015 08/04/01 (기묘) 001
/ 장인 김사형의 병을 낫게 하려고 처남의 시체를 태운 신효창을 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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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司憲府)에서 전 총제(摠制) 신효창(申孝昌)의 죄를 청하였으나 용서하였다. 신효창은 김사형(金士衡)의 사위이다. 김사형의 아들 김육(金陸)과 그 아내 곽씨(郭氏)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사형의 병(病)이 위독하니 무당[巫覡]들이 모두 말하기를, ‘육(陸)의 부처(夫妻)가 탓이 되었다.’고 하였다. 신효창이 그 말에 혹(惑)하여 마침내 육(陸)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사헌부에서 신효창을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신효창이 그 아들 신자수(申自守)에게 글읽기를 가르치다가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에 노(怒)하여, 아들을 묶어 놓고 노예(奴隷)를 시켜 형(刑)을 가해 거의 죽게 하였고, 혹은 토굴(土窟) 가운데에 두고 준엄(峻嚴)한 형벌을 가해 원수같이 하여 천총(天聰)에까지 들리고, 사람들의 입에 파다하였으니, 그 참혹하고 인자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한다.
태종 014 07/07/30 (신사) 003
/ 상락 부원군 김사형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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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이 졸(卒)하였다. 김사형의 자(字)는 평보(平甫)인데,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대대로 귀하고 현달하여, 고조(高祖) 김방경(金方慶)은 첨의 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으로서, 문무 겸전의 재주가 있어 당시의 어진 재상이었고, 조부(祖父) 김영후(金永煦)는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였다.
김사형은 젊어서 화요직(華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이르는 데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무진년 1388 가을에 태상왕이 국사를 담당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고 대신을 나누어 보내 각 지방을 전제(專制)하게 하였을 때, 김사형은 교주 강릉도(交州江陵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어 부내(部內)를 잘 다스렸다. 경오년 1390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였고, 조금 뒤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대헌(臺憲)에 있은 지 일년이 넘었는데 조정이 숙연(肅然)하여졌었다. 여러 번 전직(轉職)하여 삼사 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가, 임신년 1392 7월에 여러 장수·재상들과 더불어 태상왕을 추대하여,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겸 병조 전서(兵曹典書), 응양위 상장군(鷹揚衛上將軍)에 승진하고, 일등 공신(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어 분의 좌명 개국 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2월에 문하 우시중(門下右侍中)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작(封爵)되어,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를 받았다. 정축년 1397에 겸 판사헌부사(判司憲府事)를 제수받았다.
무인년 1398의 변란에 김사형이 조준(趙浚)과 함께 대궐에 나가 백관을 거느리고 적장(嫡長)을 세워 사자(嗣子)를 삼을 것을 청하였다. 상왕(上王)이 이미 내선(內禪)을 받으니, 녹공(錄功)이 또 1등이 되어 공신의 호를 더하기를, ‘동덕 정난 정사(同德靖亂定社)’라 하였다. 건문 황제(建文皇帝)의 등극 때 1399에 중국에 들어가 하례하였다. 기묘년 1399 12월에 스스로 성만(盛滿)하다고 진달(陳達)하여 여러번 직임을 그만두기를 비니, 상왕이 오랫 만에 허락하였다. 김사형이 조준과 더불어 8년 동안 함께 정승노릇을 하였는데, 조준은 강직하고 과감하여 거리낌 없이 국정(國政)을 전단(專斷)하고, 김사형은 관대하고 간요한 것으로 이를 보충하여 앉아서 묘당(廟堂)을 진압하니, 물의가 의중(依重)하였다. 주상이 즉위하자, 신사년 1401 3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임오년 1402 10월에 사임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가 된지 달포가 지나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사제(私第)로 은퇴하였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卒)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부대언(左副代言)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김승(金陞)과 김육(金陸)이다.
태종 014 07/09/13 (계해) 003 / 김사형의 빈소에 친히 조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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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金士衡)의 빈소(殯所)에 친림(親臨)하여, 악차(幄次)에 나아가 주상(主喪)하는 손자 김종준(金宗浚)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고 돌아왔다.
○권근(1352-1409), 변계량(1369-1430) 등이 만사를 지었다.
양촌선생문집 제10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공 사형(金公士衡)에 대한 만사 ---권근(權近)
너그럽고 후한 자질 덕망도 높아/寬厚天資德望尊
개국한 공훈이 성조에 으뜸이라/聖朝開國作元勳
잇달은 철권주D-001은 맹부주D-002에 간직되고/聯翩鐵券藏盟府
빛나는 금장주D-003이 상문에 줄지었네/煥赫金章繼相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은 늘 목마른 것같이 하였고/心爲憂民常自渴
아들 잃은 슬픔에 눈이 더욱 어두웠네/眼因哭子更多昏
하늘이 남기지 않는 뜻 참으로 모를레라/蒼天不憖誠難料
해로가주D-004 슬픈 소리 애가 끊어지누나/薤露聲中正斷魂
[주D-001]철권(鐵券) : 공신에게 나누어 주던 훈공을 기록한 책. 《史記 高帝紀》에 "공신과 더불어 부절(符節)을 가르고 맹세를 기록한 철권과 단서(丹書)를 금궤(金匱)에 넣어 종묘(宗廟)에 보관하였다." 하였다.
[주D-002]맹부(盟府) : 서약한 문서를 보관하는 곳. 《좌전(左傳)》 희공(僖公) 26년에 "공을 기록하여 맹부에 보관하는 것은 태사(太師)의 직책이다." 하였다.
[주D-003]금장(金章) : 금으로 만든 인장(印章)으로 금장 자수(金章紫綬)와 같다. 진·한(秦漢) 시대 재상들이 사용했다.
[주D-004]해로가(薤露歌) : 만가(挽歌). 사람은 부추잎의 이슬 같아서 해만 뜨면 말라 버린다는 것인데, 한(漢) 나라 전횡(田橫)의 문인(門人)이 지은 만가에 해로와 호리(蒿里) 2장이 있다. 《古今注 音樂》
춘정집 제4권 /시(詩)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대한 만사 ---변계량(卞季良)
대대로 전해 오는 적선이 뛰어나고 / 傳家積善正無倫
정말로 동한의 사직의 신하였지 / 眞箇東韓社稷臣
나라에 마음 바쳐 귀밑머리 희어졌고 / 許國寸心雙鬢雪
사람 대하는 그 화기는 일단의 봄이었지 / 接人和氣一團春
운대에서 필단 잡아 큰 공로 드러나고 / 芸臺繪綵殊勳著
어가가 왕림하여 은총이 새로웠네 / 玉輦親臨寵數新
육십칠 년 모두 다 꿈 속과도 같아라 / 六十七年渾似夢
처량한 상엿소리 새벽에 들리었네 / 薤歌凄楚響淸晨
춘정속집 제2권 /부록(附錄)
(변계량) 연보(年譜) 미상(未詳)
7년 정해(1407) 선생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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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월과시(月課詩)를 바쳤다.
당시에 중월부시법(仲月賦詩法)을 시행하였는데, 영예문관춘추관사(領藝文館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근(權近),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석인(成石因) 등이 관각(館閣)의 제학(提學) 2품 이상 관원들과 함께 예문관에 모였다. 시(詩)와 표(表) 두 가지의 제목을 내고 3품 이하 문신들에게 각기 집에서 글을 지어 3일 안에 바치게 하였는데, 선생이 1등을 하였다.
○ 김 상락백(金上洛伯) - 사형(士衡) - 을 곡하였는데, 만사를 지은 것이 있다. - 원집에 보인다.
11) ▣ 익원공(士衡) 할아버지 장지(葬地)에 얽힌 이야기 ▣
(2004. 3. 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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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신효창이 장인 김사형(金士衡)의 장지를 구하기 위해 봉안역(奉安驛) 뒷산에 올라갔다.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내 오대산의 좌우 양쪽 산맥 줄기는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그 중앙 산맥을 찾지 못해 애태웠는데, 지금 보니 저기에 있구나."
라고 말하고,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그러고는 말을 달려 곧바로 양근군(楊根郡) 서쪽으로 가서 한 지점을 지적하여 묘지를 정했다. 재실(齋室)을 지을 장소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잠시 쉬는 사이에 고단하여 깜빡 잠이 드니, 꿈속에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알려주었다.
꿈을 깬 신효창은 청의동자가 일러준 장소에 재실을 짓고, 그 이름을 '중은(中隱)'이라 했다. 그것은 오대산 중앙 맥이 여기에 와서 멈춰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 산 이름을 '청제(靑帝)'라고 했는데, 그것도 청의동자가 나타나서 일러준 것과 연관을 맺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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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도서] 한국인 이야기》
○권근(權近),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고,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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