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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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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04 23:38 조회1,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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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초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글씨품평 때문에 초희를 호출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이제껏 아버지는 초희가 바깥사랑에 드나드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어머니를 통해 마땅찮은 심사를 전했을 뿐 직접 문제삼진 않았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손님에게 인사드리러 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아버지는, 초희가 글 읽는 것을 손님이 들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래, 피할 수 없는 매라면 일찍 맞는 게 좋다.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고 오라버니들을 따라 나섰다. 안사랑에 이르자 문밖으로 손님과 담소하는 아버지의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큰 오라버니가 섬돌아래 서서 자신들이 왔음을 여쭈었고, 이어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하회가 있었다.
 방안에는 다담상을 마주하고 주객(主客)이 앉아 있었다. 손님은 아버지 연배로 보였는데, 푸른색 도포차림을 한 키가 크고 마른, 청수한 느낌을 주는 노 선비였다. 오라버니들은 노 선비와 안면이 있는 듯 깊이 읍(揖)을 했는데, 초희도 오라버니들 옆에 서서 음전하게 읍을 했다. 아버지가 다담상을 옆으로 밀며 노 선비와 삼남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성(筬)이와 봉이는 어릴 때 자네가 본적이 있을 테고, 저 옆에 말썽쟁이 꼬마 녀석이 늦게 본 내 여식일세. 너희들은 봉래(蓬萊)선생께 인사를 드려라. 외직(外職)으로 다니시느라 아주 오래간만에 오셨다만 애비의 이십년 넘는 벗이니라 』
 봉래 양사언. 언젠가 작은 오라버니에게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당대에서 가장 이름높은 명필이라고. 세 남매는 봉래선생 앞에 나란히 서서 큰절을 올렸고, 봉래선생은 반배로 답례를 했다.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삼남매에게 말했다.
  『 성이 봉이는 잠시 옆에서 기다리고, 초희 너는 이리 오너라 』
 올 것이 왔구나. 초희는 마음을 다져먹고, 아버지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초희 너, 앞으로는 오라비들 방에 가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
 언제나 이랬다 아버진. 이유와 사리를 설명 않고, 자신의 결정만 전했다. 초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나빴다. 손님 앞에서 아버지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묵언(默言)의 항변으로.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성색(聲色)이 조금 전 보다는 엄격해져 있었다.
  『알겠느냐 ! 』
  『네. 』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버지의 명은 곧 법이었으므로.
  『됐다. 그만 나가보아라. 그리고 나가거든 내당에 들러 저녁상을 들일 때 반주는 죽엽청으로 하라 일러라. 』
 초희가 하직인사로 아버지에게 절하고, 봉래선생에게 인사를 하려할 때 봉래선생이 뚜벅 물었다.
   『초희라고 했느냐? 』
   『네.』
   『글을 읽고 싶으냐? 』
 초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봉래선생이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눈빛이 깊고 서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초희를 보는 봉래선생의 눈빛은 차츰차츰 어두워졌다. 그녀는 그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아가, 글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
 그녀는 그 말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앞에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고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데 옆에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이 사람 봉래, 어린아이를 잡고…』
 초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봉래선생에게 깊숙이 절하고, 뒷걸음으로 물러 나왔다. 툇마루로 나오자 한줄기 눅눅한 저녁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갔다. 비님이라도 오시려는 것일까? 저녁하늘에 검은 구름이 먹물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당으로 내려와 안채로 걸음을 옮기다 뒤를 돌아봤다. 봉래선생의 그 어두운 시선이 이상하게도 가슴에 맺혀 불현듯 발길을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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