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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파 연보자료 30(끝)---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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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5-03 23:15 조회1,39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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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1년 1408년 태종8

太宗 015 08/04/01(己卯) 001 / 장인 김사형의 병을 낫게 하려고 처남의 시체를 태운 신효창을 용서하다 


○8촌 김익달의 아들 김고, 8촌 김성목의 손자 김익렴이 문과에 동방 급제하였다.

제학) 김고(金顧)

태종(太宗) 8년 (무자, 1408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16(同進士16)

인적사항

자(字) 경보(警甫)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김익달(金益達)

조부(祖父) 김진(金縝)

증조부(曾祖父) 김영돈(金永暾)

외조부(外祖父) 박동생(朴東生)

처부(妻父) 정절(鄭節)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408(무자) 생원시

전력(前歷) 수녕부승(壽寧府丞)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한림,사인(翰林,舍人)


전서) 김익렴(金益廉)

태종(太宗) 8년 (무자, 1408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인적사항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희신(金希信)

형(兄) 김익정(金益精)

이력 및 기타사항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지평(持平)



사후2년 1409년 태종9


태종 17권 9년 4월 16일 (무자) 001

/ 김한로를 예조 판서로 임명하는 등 사헌부·사간원 포괄하여 인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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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현(柳廷顯)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김한로(金漢老)를 예조 판서로, 안노생(安魯生)을 충청도 도관찰사로, 이종선(李種善)과 이회(李薈)를 좌·우사간 대부(左右司諫大夫)로, 민설(閔渫)을 사헌부 집의(執義)로, 김익정(金益精)을 장령(掌令)으로, 유박(柳博)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태종 17권 9년 4월 19일 (신묘) 003

/ 쇄권색을 설치하여 각사의 재정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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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여 이조 판서 유양(柳亮)과 반성군(潘城君) 박은(朴訔)을 제조(提調)로 삼고, 사간(司諫) 이회(李薈)와 장령(掌令) 김익정(金益精)을 별감(別監)으로 삼아서, 10년 이래의 각사(各司)의 용도(用度)를 구교(句較)하게 하였다.

 

 

태종 17권 9년 윤4월 18일 (경신) 001

/ 양인을 호소하는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은 헌부의 관리들을 귀양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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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持平) 유박(柳博)을 금주(錦州)로, 집의(執義) 민설(閔渫)을 상주(尙州)로 유배시키고, 장령(掌令) 김익정(金益精)을 파직시켰다. ---임금이 의정부에 내려 그 죄를 의논하여 유배시키고, 김익정은 다만 원의(圓議)에 참석한 까닭에 파직시켰다.



사후3년 1410년 태종10

태종 020 10/07/12 (정축) 004 / 태조의 배향 공신을 조준·조인옥·이화·이지란 등으로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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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을 정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을 모아 태조의 배향 공신을 조준(趙浚)·남은(南誾)·조인옥(趙仁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는 태조에게 공이 있는 사람이고, 청해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은 젊었을 때부터 수종(隨從)하고 또 공도 있으니, 이 두 사람도 배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성석린(成石璘)이 아뢰었다.

“개국(開國)할 때 공이 있고 없는 것은 주상께서 친히 보신 바이니, 신은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감히 이동(異同)이 있겠습니까?”

조영무(趙英茂)가 대답하였다.

“이화는 왕친(王親)이고, 이지란은 원종(原從)인데, 모두 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국의 공으로 논한다면 두 사람의 배식(配食)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윤(河崙)이 대답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배향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임금이 하윤의 의논을 따랐다. 김사형(金士衡)을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하윤에게 물으니, 하윤이 말하였다.

“인군(人君)이 신하에게 물으면, 신하는 감히 바른 것으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사형은 공이 없으니 배향함이 마땅치 않습니다.”

정부(政府)에서도 또한 아뢰기를,

김사형은 가문(家門)이 귀하고 현달하며, 심지(心地)가 청고(淸高)하기 때문에, 태조께서 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본래 개국(開國)의 모획(謀劃)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또 모든 처치(處置)를 한결같이 조준(趙浚)만 따르고, 가(可)타 부(否)타 하는 일이 없었으니, 배향할 수 없습니다.”

하여, 마침내 참여하지 못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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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4년 1411년 태종11


○ 8촌 김구용의 아들 김명리,


태종실록021 11/06/17(병오)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하여금 연안 부사(延安府使) 유순(柳洵)·지해풍군사(知海豊郡事) 안질(安?)·지배주사(知白州事) 이계경(李季卿) 등이 농사를 권장하기를 게을리 한 죄를 묻게 하였다. 처음에 경기 경력(京畿經歷) 김명리(金明理)를 불러 비의 혜택[雨澤]과 농사[禾稼]의 형편을 물으니, 김명리가 아뢰기를,

“연안(延安)·해풍(海豊)·배주(白州)에는 싹이 나지 못한 것이 3분의 1이나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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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022 11/07/10(기사)

경기 수령관(京畿首領官) 김명리(金明理)를 불러 곡식의 이삭이 말라 죽은 상황을 묻고 명하기를,

  “내가 들으니, 수원부(水原府) 등지에 화곡(禾穀)이 모두 말랐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화곡이 비록 무성하지는 못하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말한 사람은 수원 사람이니, 그대는 함께 가서 질정하여 거짓이거든 곤장을 때리라.”



○ 8촌 김구덕,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 11월. 20일(정축)

/(김씨를 명빈으로, 노씨를 소혜 궁주로, 김씨를 숙공 궁주로 책봉하다)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 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 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임금이 김구덕(金九德)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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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촌 김성목의 손자 김익정, 태종과 후에 세종의 측근이 되었다. 1411년(태종11)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오래동안 칭송되었다.

*1414년(태종14)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1418년(태종18년)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발탁되어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어 세종의 측근이 되었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8월8일) 하자마자 좌부대언(左副代言) 즉 좌부승지가 되어 우대언(右代言),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거치었다. 참찬관으로 경연에 참석하여《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기를 청했다.

세종4년(1422)12월12일 파직될 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좌석 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侍宴)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사람들의 시기를 사게되어 하찮은 일로 파직되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

제6권 p51<영월군 명환(名宦) 본조(本朝)>

김익정(金益精) :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한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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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중국 하얼빈에서 시작한 익원공 연보자료 연재를 이제야 마칩니다.
익원공께서는 여말선초 우리 가문의 기둥이었습니다.
또 다른 자료나 기록이 엄청나게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익원공 후손가에서는 전해오는 고문서를 두루두루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며칠 쉬었다가 익원공 간략연보를 만들어 소개하겠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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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그 줄기엔 선조들의 수 많은 노력과 고단한 삶들이 깃들어 있기에...
또 다른 줄기를 뻗어가는지도 모르겠어요.
중국에서부터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