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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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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12 12:57 조회1,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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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회>

 

 

 

 

 

  그는 손곡을 도우고 싶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아버지께 말씀드려 서리(胥吏)자리하나 마련할테니 가시겠느냐고 물었다. 손곡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젊은 시절 한때 생활 때문에 한리학관(漢吏學官)을 하다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네. 그때 *격암(格庵)선생이 말하더군. "자넨 천문성(天文星)을 타고났다" 고, 그러면서 천문성을 타고 난자는 몇 푼 급료보다는 글이 일러주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 그게 운명이라는군. 그렇지 않으면 더 불행해진다고. 그러니 날 동정은 말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도 선택을 분명히 할 때다. 결심은 이미 섰다. 그러나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에 서가에 꽂힌 책들이 들어왔다. 환로와 학문을 병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네. 그래, 책부터 정리를 하자. 그는 과거 과목이라 하더라도 학문하는데 필요한 사서를 비롯한 경학서 들과 사장서 들은 제외하고 명(銘), 잠(箴), 송(訟), 조(詔), 제(制), 책(策)따위 과거에 참고가 되는 책들은 주섬주섬 보자기에 쌓다. 그것들을 서고에 가져다 놓기 위해.
 허봉은 안 사랑채 대청 끝에 있는 서고 앞에 닿자 멈춰 서서 열쇠를 내리기 위해 서고 문 위 시렁에 손을 올렸다. 아버지는 낮에는 누구나 서고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열쇠를 서고 문 위 시렁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열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서고 문도 약간 열려있었다. 누굴까? 아버지는 아직 퇴청전이고,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머니, 아니면… 그제서야 시렁 아래 있는 걸상이 눈에 들어왔다. 초희…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서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서고 안은 벌써 어둑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서가마다 아버지의 자랑인 일만 권의 장서가 빼곡이 차 있었다. 그는 들고 온 보자기에 싼 서책들을 서고 왼쪽 끝, 과문 종류를 두는 서가에 차례로 비치했다. 그리고 서가 사이사이를 다니며 초희를 찾았다.
 초희는 서고 오른쪽 끝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빛을 마주하고 서가에 등을 기댄 채 오두마니 앉아… 그는 한동안 말없이 초희를 내려다보았다. 초희는 그가 와 있는 것도 모르고 정물처럼 미동도 않고 책에 몰입해 있었다. 서고 안엔 괴괴한 정적만 있었다. 가끔 초희의 책장 넘기는 동작이 내는 소리만 있을 뿐. 그런데 초희의 책 읽는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아름다웠다. 문득 봉래선생이 아버지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자네 여식은 천문성이 스쳐갔네. 비록 제대로 스쳐 가진 못했지만.
  『 우리 초희가 읽는 책 오래비가 한번 볼까? 』
 초희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허봉임을 알고는 안도하는 기색이었으나, 읽던 책을 내미는 손은 다소 머뭇거렸다. 태평광기(太平廣記). 허봉이 초희에게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  이런 잡스러운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 』
  『 재미있는걸요. 』
  『 책은 재미있으라고 읽는 것이 아니다. 』
  『 그럼 서고에 왜 이 책을 갖다 놓았나요? 』
 초희가 고개를 들고 빤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깊고 어두운 눈. 이 아이, 이미 서마가 고황(膏肓)에 들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아이가 글 읽는 것은 이젠 막을 수 없다. 그래, 옳지 않은 글을 읽을 바에야 제대로 된 글을 읽도록 하는 것이 났다.
  『 글을 읽고 싶니? 』
  『 …… 』
 초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숙이고, 책만 만지작거렸다.
  『 내일부터 다시 바깥사랑에 나오너라. 』
  『 그러나, 아버님이… 』
  『 아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겠다. 』
 그는 초희를 앞세우고 서고를 나서며, 마음을 다져먹었다.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부친과도 때로는 투쟁이 필요한 법" 하고 중얼거리며.


註)
*격암(格庵 ? ~ ?) 조선중기의 기인 남사고(南師古)의 호, 주역에 밝았다. 동시대 인물들과 비교해 볼 때 생년은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로 추측되고 몰 년은 임진왜란 이전인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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