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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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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5-15 17:31 조회1,6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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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회>

 

 

 

  3 눈.

   초희는 건넌방에서 대청마루로 나왔다. 벌써 세 번째.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그쳐 있었다. 이번 겨울은 눈이 잦았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기도 전에 다시 눈이 내린 것이다. 바람이 일었다. 싸락같은 눈들이 바람에 날려 왔다. 마당에 솜처럼 쌓인 눈. 하인 둘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하인들은 눈이 내리면 더 분주했다.
 섬돌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지붕에서 눈 녹은 물이 처마에 맺힌 고드름을 타고 내려와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안사랑채로 통하는 일각문 쪽을 보았다. 안사랑으로 통하는 일갈문 옆 담 아래서 소순과 행랑아범 딸이 아직도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눈사람은 거진 다 만들어져 가는 것 같았다. 소순은 초희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에 나왔을 때처럼 고개를 젓고는 다시 눈을 뭉쳤다.
 수틀 앞에서 풀려난 게 벌써 이각이 넘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등청 않는 날이라 했다. 오전에 온 손님과 아버지는 아직도 사랑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낙심한 초희는 힘없이 돌아섰다. 사랑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샛담을 넘어 대청마루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바깥사랑에 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혼자 악부체 시 하나라도 더 외워야겠다, 생각하며 돌아서 건넌방 문을 열려는데, 소순이 급히 달려왔다. 초희는 돌아섰다. 소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
  『 아기씨, 대감마님께서 손님과 방금 출타 하셨어유. 』
 초희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문득 집 뒤에서 까치 소리가 들렸다. 아마 후원 은행나무에 까치가 날아와 앉았나 보았다. 그녀는 지난 가을부터 작은 새처럼 행복했다. 비록 아버지 몰래 이기는 하지만 다시 오라버니들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오늘처럼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초희는 건넌방에 들어가서 서책을 갖고 다시 마루로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다. 눈사람은 다 만들어 져 있었다. 행랑아범 딸이 숯을 박아 눈사람에게 입과 코와 눈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향했다. 일각문을 통해 안사랑마당으로 들어섰다. 바람에 날려 온 눈 톨이 얼굴을 때렸다. 얼굴이 할퀸 듯 쓰렸다. 그러나 그녀는 괘념치 않고 활기찬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 바깥채로 나왔다.
 바깥사랑에 이르자 오라버니들이 송시를 암송 화창하는 소리가 났다. 초희가 섬돌 앞에서 두 오라비의 화창이 잠시 멈추는 틈을 기다려 기척을 내자 큰 오라버니의 들어오라는 허락이 있었다. 초희가 들어가 자리를 잡자, 오라버니들은 다시 화창하던 시로 돌아갔다. 그들은 소식의 시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녀는 서안 위에 사략을 펼쳤다. 송사(宋史)에 들어갔다. 이해를 넘기기 전에 사략(史略)을 다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희는 오늘 배울 곳을 속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언제나 이랬다. 오라버니들이 시를 화창 하는 소리를 들으면. 시경을 떼고, 육조시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 시제가 바뀌고 있었다. 黃昏猶作雨纖纖, 하고 큰 오라버니가 선창했다. 언젠가 오라버니들이 화창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눈온 뒤 북 대의 벽에 쓰노라’ 라는 시였다. 작은 오라버니의 응수가 이어졌고, 다시 큰 오라버니의 답창이 이어졌다. 그들은 노래하듯 길게 가락을 붙여 싯귀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주고받는 시를 속으로 가만히 따라하며 마음에 새겼다. 이윽고 작은 오라버니가, 未隨埋沒有雙尖, 하고 결련 두 번째 구를 받자 화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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