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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소설-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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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6-02 15:16 조회1,7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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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공호는 시전(市廛)을 거쳐 다동(茶洞)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견의 표정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공호를 따라 가다보니 그들은 창호지로 바르고 酒자를 쓴 장명등을 내건 기루(妓樓)들이 즐비(櫛比)하게 늘어선 거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견이 앞서가는 공호를 부르며 말했다.
 『 공호,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겐가? 』
 『 형님,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풍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
 『 허, 풍악이라… 』이견이 다소 뜨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둘 사람이 뭐라고 호오(好惡)를 표시하기도전에 공호가 다시 앞장서 걸었다. 이견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뒤따랐고, 허봉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공호말처럼,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풍악이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호가 안내한 기루는 거리 가장 안쪽에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서다 올려다본 취슬루(醉瑟樓)라는 기루 이름 가운데 슬(瑟)이 불현듯 슬(膝)로 보여 허봉은 순간적으로 음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초저녘이어서 일까. 그들이 취슬루 깊숙한 방 하나에 좌정할 때까지, 공호가 말하는 풍악은커녕 손님들 말소리 웃음소리하나 들리지 않아서 기루라기 보다 오히려 밀담이나 마음에 담긴 정회를 나누기 좋은 서원(書院)의 밀실 같았다. 허봉은 주문한 상이 들어오는 동안 율곡에게 하고자 하던 질문을 이견에게 하려고 입을 열었다.
 『 왕수인을 *공묘(孔廟)에 *종사(從祀)하자는 공론이 일고 있다는 소문 들었습니까?  』
 『 그랩 실은 그것 때문에 내가 향촌에 더 있을 수가 없었네. 』 이견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 대륙에 어떤 폭풍이 잉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허봉이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 그래선 안 돼, 이제 겨우 사림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
 그러나 이견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주문한 상이 들어와 차려졌고 이어 기녀(妓女) 세 명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녀들은 각기 거문고 비파 가야금 같은 악기를 앉고 있었다. 기녀들이 그들에게 절을 하기 위해 나란히 섰다. 공호가 말했다.
 『 걱정 마오. 육상산 같은 이가 오래 전에 공묘에 종사되었어도 도학이라는 큰 물줄기에 섞여 흐를 뿐이었습니다. 하물며 왕수인 같은 작은 물줄기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이 밤은 풍악을 즐기며 그 동안 쌓인 정회(情懷)나 풉시다. 』
 공호의 말이 끝나자 얹은머리를 한 기녀 셋이 절을 하고 그들 앞에 앉아 차례로 자기 소개를 했다. 가야금을 안고 들어 왔던 녹의 홍상을 한 세 번째 여인이 치마 끝단을 짚고 다소곳이 얼굴을 들며 자기 소개를 했다.
 『 연홍이, 인사 올리어요. 』
 문득 허봉의 눈앞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어둠 속에 핀 한 송이 연꽃을 보았을 때처럼. 


註)
*공묘(孔廟) -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를 모신 사당. 안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상(像)이 안치 되어 있음. 그 좌우에 동서로 건립된 별채에는 공자 제자와 역대 성현의 위패가 놓여 있음.

*종사(從祀) - 종묘나 문묘(文廟)에 신주를 모심. 유학자가 공묘에 종사 된다는 것은 성현의 반열에 오른다는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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