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백범일지(47)민족에 내놓은 몸 13. 출옥한 이후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6-06-29 16:36 조회1,391회 댓글1건본문
13. 출옥한 이후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준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 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朴永文)의 물상 객주 집 앞을 지난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쪽 첫 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한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 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은인을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 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安浩然)의 물상객주였다. 안 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였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分監長)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호!"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 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례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귀인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막(新幕)에서 일숙(一宿)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님이셨다. 어머님은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化敬)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화경이가 일곱 살밖에 안된 어린 그 어린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시겠냐고 그랬단다"
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안신 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 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간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李仁培)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도중에 나는 어머님께 불려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宴會席)에서 불러낸 것은 아내가 어머님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님과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는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님과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 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레 어머님의 호령이 내린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節行)이 갸륵하다. 그래선 못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님이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님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四顧無親)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여 형수님과 조카 며느리 고생을 아니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님은,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여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님과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鍾山) 우종서(禹宗瑞)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에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 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 중이라 어디로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에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 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 간검(看檢)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 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셔서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님을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새 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께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재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님이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댓글목록
김은회님의 댓글
![]() |
김은회 |
---|---|
작성일 |
대부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지방 출장이 많다보니 게흘러젓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