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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4) 경순왕전비(慶順王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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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02 23:36 조회1,8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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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다른 곳에서 옮겨놓고 비각을 세워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비문도 판독이 거의 불가는한 상태라고 합니다.











아래의 번역문을 경순왕릉 앞에 세워진 비명이 아니고



경주 황남동에 있는 경순왕전비임이 확인 되어 밝혀 둡니다



현재 아마도 숭혜전 근처에 모셔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도비명



동경(慶州)에 경순왕의 전(殿)이 있는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제때 향사를 모시고 모든 범절은 다 갖추어 졌으나 다만 글을 새겨서 오래도록 전할 바가 없었다.



왕의 후손 재명(再鳴)이 세계(世系)와 사적을 적어 가지고 나에게 명(銘)을 청하는 지라, 나는



경주 김씨와는 비록 적(貫)은 다르지만 시조는 같은데 어떻게 글이 졸 하다 하여 사양하겠는가?



삼가 서(序)도 쓰고 명(銘))도 짓는 바이다.



시조는 알지 이니, 탈해왕 9년 을축에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 속에서 아이 하나를 얻었다.



왕이 거두어 기르며 알지라 이름하고 김씨로 사성 하였으니 이것이 득성의 유래이다.



2세는 세한 , 3세는 아도 , 4세는 수류, 5세는 욱보, 6세는 구도, 7세는 말구이니 미추의 아우이다.



미추가 첨해왕(석씨)을 이어 왕이 되니 김씨가 여기에서 나라를 갖게 되었다. 8세는 내물왕이요,



9세는 복호, 10세는 습보로 아울러 갈문왕에 추봉되니 갈문왕이란 당시에 추존(追尊)을 일컬음이다.



11세 지증왕 원년 경진(庚辰)년 곧 제(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동혼후(東昏候) 영원(永元)2년에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였으며 상제(喪制)를 반포하고 순장(殉葬)을 금하였으니 지증은



그의 시호이다.



12세는 진종이요, 13세는 마차, 15세는 법선이니 현성왕으로 추숭(追崇)되었다.



18세는 효양이니 명덕왕으로 추숭되고 19세는 원성왕이니 처음으로 독서출신과를 두었다. 20세는



예영이요, 21세는 균정이니, 성덕왕으로 추숭되고 22세는 신무왕이요, 23세는 문성왕이요, 24세는



안(安)이요, 25세는 민공이요, 26세는 실홍이니 위흥왕으로 추숭되고, 27세는 효종이니 신흥왕으로



추숭되고 28세가 경순왕이다.



왕은 경애왕(박씨)를 이어서니 이해 정해(丁亥)는 곧 후당(중국 5대 시절)명종 천성(天成)2년이다.



9년이 지난 을미년에 천명이 이미 바뀌었음을 알고 나라를 고려에게 물려주니 태자가 간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죽음으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 둘 일이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무고한 백성들이 피 흘리고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 하고 글을 써서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양국(讓國)을 하니 고려 태조가 손님의 예로 대하고



관광순화낙랑왕(觀光順化樂浪王)에 봉하였으며 장녀인 신란공주(神鸞公主)를 아내로 맞게 하니



송나라 태종의 흥국3년이요, 고려 경종(무인3년 978년)에 흉하니 시호는 경순이라 하였다.



능은 장단부 고량진의 성거산 계좌(癸坐)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다보니 오랫동안



실전을 하였다가 영묘조(英廟朝) 무진년에 이르러 지석을 얻어 나라에 알리니 개축을 특명하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수졸(守卒) 5인을 두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도(古都)의 인사들이 왕의 백성들에게 인애로웠던 덕을 기려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천개(명나라 의종의 연호)정묘(인조5년)에 사당을 동천촌(東泉村)으로



옮겼고 인조조에 김시양(金時讓)의 장청(壯請)에 의하여 묘우를 새로 짓고 김씨 성을 갖은 이로



참봉을 삼고 쌀을 내렸으며 노비와 전답을 두게 하였다.



현묘조에는 또 연신(筵臣;경연관)의 주청에 따라 "경순왕전"이란 묘호를 내리고 유생(儒生)과



수호(守護)군과 전졸(殿卒)을 두고 호세(戶稅)를 면제하여 주기를 숭인전, 숭의전,, 숭덕전과



똑 같은 예로 하였다.



선대왕(정조인 듯) 갑인년에는 전(殿)뒷산에 사태가 날 염려가 있어 도신(道臣)이 진계(陳啓)하여



이건(移建)공사비를 특사하여 사당을 경주부 남쪽 봉황대 앞으로 옮겼으니 곧 미추왕릉의 아래



계림에서 백걸음 밖에 되지 안는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이미 제사를 지내 영령을 위로하고 또



영정을 새로 개모하여 예조에 명하여 유생과 전졸은 90여인으로, 수호군을 100여인으로 하여



호세(戶稅)5결씩을 면제해 주도록 식례(式禮)를 정하고 참봉은 이조에서 첩지(帖紙)을 내리게



하였으니 열성조의 숭보(崇報)하는 의전이 비로소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대개 삼한시대에는 국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문헌도 무징(無徵)하니 왕의 9년 동안



재유(在宥;무위로 다스림, 곧 다스린다는 뜻)한 가모(嘉謨)와 선정은 비록 훑어 볼 수 없지만 그



왕자에게 답한 말씀은 정령(丁靈;친절함)하고 칙달(가엾게 여겨 슬퍼함)하여 덕의가 넘쳐 있으니



촉주(蜀主)와 북지왕(北地王)의 일과 견주어 보면 그 현우(賢愚), 명암(明暗)이 과연 어떠한가?



저 송나라의 오월(吳越)은 아주 적은 나라로 대대로 제후의 법도를 지켜온 처지에 여러 진영이



차차 깎이고 평정에 다다름에 머리 숙이고 명을 청하였으나 그 후에 수신이 오히려 그 공덕을



낱낱이 들어 돌에 새겨 세웠는데, 생각건대 경순왕은 오래된 서업(緖業)을 이어 부강한 국력을



가졌으니 금탕(金湯)은 험함을 믿을 만 하고 병갑(군사와 무기)은 족히 적을 막아낼 만 하였으나



다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천승(千乘)을 버리기를 폐사(헌신짝)처럼 하였으니 어느



사람보다 어짐이 큰 것이다.



후세에 평판하는 선비가 잘한 일이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많았음은 지당한 일이나



전사(全史;완전한 사기)와 패승(작은사기)이 없었으나 중간에 그런 것을 쓰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혹 있다가 실전 하였는가? 하여간 슬픈 일이다. 왕의 묘정에 비를 세우기를 여러 사람이 청하여



선조에 이미 윤허를 받았으나 모든 준비가 덜 되어 이제야 비로서 새기게 되니 바로 후손들의



보본하는 정성에서 이룩된 것으로 왕의 여운이 영해간(嶺海間)에 애연(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히



덮여 씌워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하도다. 왕의 전비(前妃)는 박씨이니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고, 후비 왕씨는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두었으니, 태자와 차자(次子)와 영분공자(永芬公子)와



은열, 석, 건, 선, 추 이며, 장녀는 이금서에게 차녀는 황경에게 출가하였다.



왕의 자손이 수없이 많지만 경주로 본을 한 집이 넷이 있으니 영분공자의 후손과 시중시랑공의



후손과 태사공의 후손과 판도판서공의 후손들이다. 명하여 가로되





계림의 오른쪽,



봉황대 남쪽에 영전이



그윽한 단청도 빛나여라.



유상(遺像)이 엄연하니



곤룡포에 수치 마라



그 누구를 모시는가?



거룩하신 경순왕님경



왕의 양국하실 적에



어진말씀 나타났고



그와 같이 후덕하심



그 후손이 창성하네



우뚝 솟은 용의 머리



묘의 곁에 세웠도다



이 명시를 지었으니



영원토록 빛나리라.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강릉 김계락(金啓洛) 글을 짓고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영성균관사 김노경(金魯敬) 글씨쓰다.



2002년 4월2일 경순왕 30세손, 충렬공 22세손, 문온공 18세손,

안동인(安東人) 솔내 김영환(金榮煥) 옮겨쓰다.



참고자료

글지은사람 김계락(金啓洛)

1753(영조 29)∼1815(순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이조판서 화진(華鎭)의 아들이다.



1773년(영조 49) 성균관시에 합격하여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진사가 되었다.



1783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수찬·시강원사서·



검상(檢詳)·동학교수(東學敎授)·서학교수를 거쳐서, 1785년에는 충청도경시관(忠淸道京試官)이 되었다.



이듬해에 강촌(江村) 400호가 불에 타자 지평으로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어 그 실정을 조사한 뒤



이들의 조세감면을 건의하였다.



1788년에는 전라도경시관이 되었고, 1791년에는 경상도장시도사(慶尙道掌試都事)가 되었으며, 당시



영남지방에 수재가 나자 왕명을 받아 각종 민폐를 개선하였다.



1793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후 형조참의·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도총부부총관·성천부사·대사간·



한성부좌윤·승문원제조·실록청당상 겸 동지춘추관사·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03년 충청감사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상으로 사퇴하였고, 상을 마친 뒤 형조판서·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변려문에 능했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사부(詞賦)·시율(詩律)·표전(表箋)·송(頌)·



조(詔)·책(策) 등의 문장에 뛰어났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글쓴이 김노경(金魯敬)



1766(영조 42)∼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



월성위(月城尉) 한신(漢藎)의 손자이고, 판서 이주(#이96柱)의 아들이며, 정희(正喜)의 아버지이다.



1801년(순조 1)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내고, 1805년 현감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을



거쳐 승지·이조참판 및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또, 1819년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 1827년 판의금부사·광주부유수·지돈녕부사 등의 요직을 거치고,



사행(使行)으로서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1822년에는 동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익종이 대리청정을 할 때 김로(金#노54)·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행사하고,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1830년 지돈녕부사 재직중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이45安置)되었다가



1840년에 사사되었다.



1857년(철종 8)에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연차(聯箚)로 신원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써 아들인 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신라경순왕전비 新羅敬順王殿碑〉·



〈신의왕후탄강구묘비 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의 글씨가 전한다.



글씨 사진

http://www.koreandb.net/ImgDB/Web/Work/3628.jpg





경순왕 신도비명 원문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영환







▣ 김항용 - 정말로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발용 -

▣ 김영윤 - 잘보았읍니다

▣ 김주회 - 고맙습니다.

▣ 김재익 -

▣ 김은회 -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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