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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입체낭독 '포화 속의 영웅들(동락리 전투의 영웅들 4부)'-김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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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6-07-20 23:17 조회1,52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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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화 속의 영웅들(동락리 전투의 영웅들)

▣ 동락 이야기 1 - 살인마 '고재봉'과 '김재옥' 여사 ▣


  1963년 10월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마을. 충격적인 도끼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 날 신문들은 이 끔찍한 도끼 살인사건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사람들은 이 충격적인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도끼 살인사건이 그 악명 높았던 살인마 고재봉 사건이었다. 

  고재봉은 군에 있을 때에 군부대 부대장이었던 박모 중령의 사택에 가서 여러 가지 잔일들을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재봉은 여러 가지 일들을 끝내고 박 중령의 서재에서 나오다가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 장면을 그 집 가정부가 보고는 소리 질렀다. '저번에 네가 군화도 훔쳐 갔지.' 졸지에 고재봉은 박 중령 집에서 일어났던 모든 도난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몰려버렸다. 화가 난 고재봉은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도끼를 집어 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까불면 너 죽여 버리겠어~' 

  그 일로 고재봉은 살인미수로 육군형무소에서 7개월간 복역해야 했다. 고재봉은 억울하다는 생각 때문에 출소하면 박 중령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출소하자 고재봉은 이른 새벽에 박 중령이 살았던 사택으로 찾아가 그토록 끔찍한 도끼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박 중령 가족은 그 사이에 다른 곳으로 전속을 가버렸고 그 사택에는 이득주 중령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 중령이 아니라 이득주 중령과 그 부인 김재옥 선생님 등 일가족 6명이 고재봉의 도끼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재옥 선생님 가족이 화를 당한 것이다.

  고재봉은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어찌나 포학했는지 그의 감옥생활 중 그에게 밥그릇을 따지는 선배가 없었다. 한번은 창살 사이로 엿보는 교도소 소장의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서 쓰러뜨리기도 했다 한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음담패설은 거치는 데가 없었다고 한다.

  이 충격적인 사건 보도를 접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 대한성서공회의 전도인 일을 하고 있던 한 분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치를 떠는 이 엄청난 강도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서울구치소 담당 검찰관의 도움으로 고재봉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성경말씀을 펼쳐놓고 고재봉에게 읽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외아들 예수님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는 살인마 고재봉 앞에서 한참동안 복음을 전한 뒤에 '이 불쌍한 죄인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재봉이 말문을 연 것입니다. 고재봉은 구치소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장님, 이제 모든 것을 자백하겠습니다.' 

  그 이후에도 고재봉은 계속 그 전도인의 전도를 받았다. 그는 순식간에 신약성경을 다섯 번이나 읽었고, 구약성경도 여러 번 읽었다. 그는 감방에서 처절하게 회개하면서 기도했고 성령체험과 지옥과 천국에 대한 환상도 보았다 한다. 그는 이제 감방 전도인으로 변신했다. 

  고재봉은 예수님을 자기 자신의 구원주로 영접한 뒤에 사형집행을 당할 때까지 서울구치소에서 무려 1800명의 죄수들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살인마 고재봉, 그는 요3:16의 말씀을 외우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외아들 예수님을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아래를 클릭하면 살인마 고재봉 간증 수기를 읽어 볼 수 있습니다.

http://yesoohyanggi.or.kr/bbs/zboard.php?id=d10&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


동락 이야기 2 - 김재옥 교사와 신용관 중위

  김재옥 여교사는 1931년 3월 12일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났고, 1950년 5월 20일 충주 사범학교(강습과)를 1회 수료하면서 6월 20일 충북 중원군 신니면의 동락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동락국민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며칠 후인 6월 25일 불법 남침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고, 7월 7일에는 동락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둔을 하였다. 인민군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 병력 약 3,000여 병력이었다.

  한편, 김재옥 여교사는 피난도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병력이 학교로 집결하자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몰래 빠져 나와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4km가 넘는 험준한 부용산(음성의 북서쪽이며 무극의 뒷산)에 매복 중이던 육군 6사단 7연대 2대대를 만나게 되었다. 김재옥 여교사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후퇴만 하는 국군을 맹렬하게 비난하며 적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상황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제2대대의 임무는 부용산(644고지)을 방어하는 것이지만 대대장 김종수 소령과 박격포 중대장 신용관 중위 등은 작전회의 끝에 적을 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어 기습공격을 결심하였다.

  오후 5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한 2대대는 신용관 중위의 박격포 한방을 시작으로 1개 연대의 적을 격퇴하는 전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재옥 교사는 그후 당시의 7연대 소속 소대장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군인 가족으로 생활하였다. 남편을 따라 강원도 인제지방에 있을 때 어론국민학교(인제군 어론리 소재) 설립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였고 군인교회를 건립하여 군인 및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1963년 10월 고재봉 사건 때 저격 대상으로 오인 받아 김 여사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다.

  그 후 1966년 국방부에서는 김재옥 여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양하기 위해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상영하였다.

  동락 전투 당시 박격포 대장이었던 신용관 중위는 김재옥 여교사의 하나 남은 아들을 찾아 그가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68년 해양 경찰대장으로 재임시 고인이 된 김 교사의 충혼을 달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현충탑을 건립하였다.

  1990년에는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김재옥 교사 기념관을 건립하였는데, 1층에는 전시실로 2층에는 교육관으로 동락전투 전승기념일인 7월 7일에 개관을 하였다. 그 후 이 기념관은 충주시내 학생들의 안보교육의 장으로, 또 통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락 이야기 3 - 신용관 중위와 동락 전투

  6.25 전쟁은 북괴군의 준비된 기습전으로 시작되었으며, 개전 초의 우리 국군은 참담한 패전을 거듭하였다.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경기지역과 강원지역을 연결하는 북괴군의 대규모 전선이 형성되면서 삽시간에 충청북도 북부지역까지 위협 당하였다. 이에 충청북도 일원에서 북괴군의 무력도발에 대응하여 일전을 준비하며 내부 작전을 펴던 국군 제 6사단 7연대 2대대와 충주시 동락초등학교에 당시 교사로 근무하던 김재옥 교사의 활약으로 6.25 발발 이후 최초,최대의 승전을 기록하며 '빛나는 역사의 장'으로 남은 전투사가 바로 '동락전투'였다.

  6.25 기습 전쟁을 일으켜 38선을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불과 10일만인 7월 5일에 북괴군은 이내 음성군 무극리를 점령하였다. 계속 밀려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예하 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여 적군의 남침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제 7연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가섭산 줄기에서 광월리 뒷산까지 매복 중이었는데 명령을 받고, 장시간의 격전 끝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하던 중 무극리 북방 2Km 지점에서 강력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 15사단 48연대는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충주 방면으로 남진 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 7연대 제 1대대는 음성-충주 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 2대대는 무극리 동편 부용산(644고지)에서 매복작전에 돌입하였다. 

  7월 7일 12시 쯤, 북한군은 동락초등학교로 진입을 하였다. 김재옥 여교사는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킨 후 부용산 쪽으로 피난을 가던 중에 매복작전 중인 제2대대장에게 적 15사단 48연대와 포병대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이 제보를 통해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중장예편 2군 사령관 역임)은 동락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학교 교정에는 수십 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때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연대 본부에 보고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으므로 7월 7일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중대병력을 이동 배치하였다. 한편,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거짓 정보를 사실로 오인한 적 48연대는 안심하고 저녁 준비를 하며 경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정각 17시가 되자 학교 뒷산에 배치하고 있던 6중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기습 공격에 놀란 적들은 반격 준비를 하였고 충주 쪽으로 진열시켜 놓았던 대포를 돌려 6중대를 향해 발포하였으나 모두가 산을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당시 2대대에는 모두가 소총뿐이었으며 박격포는 1문 밖에 없었다. 박격포 중대는 학교 앞산에 자리를 잡았는데(현 전승비가 세워진 곳), 김 대대장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 중위(육사8기생 전 해양 경찰대장)로 하여금 제 1탄을 발포케 하였는데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함으로서 순식간에 적은 괴멸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그분들의 증언(證言)과 전사(戰史)를 확인해 보면 5시 전에 박격포는 도착하였으나 포판은 도착이 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게다. 한 5분 쯤 후 포판이 도착하였는데 포판을 짊어지고 온 병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단다. 마침 벼가 한참 자라고 있었던 계절이라 볏잎에 얼굴이 다 긁힌 것이었다.)

  이때 북쪽으로 도주 중이던 적은 제 6중대에 포위되어 도처에 사체를 남기고 일부만 산중으로 도피했으나 다음날(7월 8일) 미명과 함께 실시된 아군의 소탕 작전으로 오전 8시에는 완전 섬멸의 개가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노획한 북한군의 노획무기는 대전에서 시민들에게 전시되었고, 무기 1점씩은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되어 UN군 16개국이 참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기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동락전투에 참가한 전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다. 이 당시 연대 전 장병의 1계급 특진은 국군창설 이후 최초의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개전 이후 최초,최대의 승리였으며, 7연대의 승전소식은 사기가 저하된 국군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다. 또한 낙동강까지 후퇴함으로써 국토의 90%를 상실한 상황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반격작전의 기반을 조성하였던 전투였다.


동락 이야기 4 - 동락과 나의 인연

  1999년 9월 1일자로 이 동락초등학교에 승진 발령 받은 나는 이 학교가 6.25 당시는 동락전투의 격전지요 지금은 통일교육의 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 동네마다 다니면서 상영하던 흑백 영화 ‘전쟁과 여교사’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그곳이라니. 

  김재옥 교사 기념관은 10년이 되다보니 전시물들이 낡고 사진도 액자에 넣어 걸어놓은 것이라 색은 발하고 곰팡이도 나고, 빨리 리모델링이 필요하였다. 다행히도 1억 6천이라는 예산이 교육부로부터 2000년도 초에 나오게 되어 리모델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락전투 당시 주인공이었던 김종수 장군님과 신용관 장군님이 학교까지 오셔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도 해 주셨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6월이 되면서 옛 시설 속에서 통일다짐교실이 열리게 되었다. 이 교육은 충주시내 6학년 학생들이 하루에 200여명씩 입소하여 통일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때 프로그램의 주된 활동으로는 통일연극으로 나는 계획을 하였다. 통일을 생각하거나 통일된 상황을 미리 대본을 꾸며 연극을 발표하는 활동이었다. 많은 재미있는 연극들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통일다짐교실이 열린 첫날 동양일보의 기자가 와서는 통일다짐교실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김재옥 선생님의 사진(그분의 아들이 보관하던 것인데 기념관 리모델링을 위해 신용관 장군님이 구해 오신 실제 사진)을 찍어 갔다. 그러더니 그 주 토요일 자 동양일보에는 크게 기사가 나기를 ‘아직도 반공교육을 하고 있다.’ ‘김재옥 교사 우상화 교육을 하고 있다’라고 거짓 기사를 실었다.

  이런 엉터리 기사에 내 마음은 너무도 아프고 찟어질 듯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때문에 ‘반공’이라는 단어나 6.25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무 말 못하고 내 인생의 가장 가슴 아픈 시간이 되었다.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자료를 구하면서 동락전투 역사를 많이 알게 되었고 동락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는지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국군방송의 작가가 학교로 찾아와 이 전투사를 직접 듣고는 실화에 거의 일치하는 내용으로 국군방송에서 4부작의 연속 입체낭독을 제작 방송하였다. 나는 이 방송을 간신히 녹음하였다. 덕분에 여기에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념관의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교육관이다. 지금 생각해도 리모델링은 아주 잘 되었던 것 같고 당시 고생하신 김응수 교장선생님도 내 마음도 뿌듯하다. 그러나 여름에 공사가 끝나고도 재개관 행사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매년 모이는 행사지만 2000년 7월 7일에도 충북의 6.25참전 용사들이 운동장에 모여 행사를 하였다. 그분들은 모두가 나이 70이 넘으신 분들이었다. 당시 동락전투의 주인공들이 대대장과 중대장과 다시 재회하는 걸 보면서 그들의 생명을 건 전투에서 쌓은 전우애를 다시 한번 보았다.

  아~ 그분들의 목숨을 건 애국혼이 있었기에 이 남쪽 땅이라도 공산화가 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일 게다.

                                                                                                                     2006. 2. 18.

☞ 아래 속성을 클릭하면 연속입체낭독을 들을 수 있습니다.

(1부)http://skc5210.pe.kr/bbs/data/tongrak1.mp3

(2부)http://skc5210.pe.kr/bbs/data/tongrak2.mp3

(3부)http://skc5210.pe.kr/bbs/data/tongrak3.mp3

(4부)http://skc5210.pe.kr/bbs/data/tongrak4.mp3


※ 김재옥(문) 여교사와 관련 우리가 찾고 확인하여야 할 사항.

1. 6.25전쟁 당시 동락리 전투의 대대장인 김종수 소령(후일 중장으로 예편)이 1960년 쓴 ‘전쟁과 여교사’ 원작 실화소설.

2. 이를 바탕으로 1960년대 초 반공교육 자료가 실린 교과서.

3. 1966년 국방부 주관으로 제작된 임권택 감독, 김진규, 엄앵란 주연 영화  ‘전쟁과 여교사’ 필름.

   참고 : 인터넷 검색결과 이 필름은 '한국영상자료원(서초동)'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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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어렴풋이 기억나는 60년대 라디오 방송 연속 입체 낭독속의 주인공
김재옥 여교사와 동락리 전투 내용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