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48) 민족에 내놓은 몸 14.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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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03 15:49 조회1,648회 댓글0건본문
14.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아버님 4 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觀洙), 태수(泰洙)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早卒)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 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 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時局)이 변하여서 나 같은 사람이 전과 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돌아보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東山坪)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 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았다.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水土)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夜學)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上等畓) 2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 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노 군 형제를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成群作黨 : 무리를 모으고 패거리를 만드는 것 - 편집자 주*)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敎員)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 시간으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池一淸)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계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이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1년 소출(所出)을 몽땅 빚쟁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己未年)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材木商)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怡隆洋行)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마두(浦洞碼頭)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 강가에는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公昇西里) 마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金弘敍), 서병호(徐炳浩) 네 사람이었고, 그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 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일찍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金甫淵)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 군은 내가 장련에서 교육 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 동지를 만났다.
임시 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次長制)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 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으로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듣고는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만들어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虛名)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政廳)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尹顯振), 이춘숙(李春塾), 신익희(申翼熙)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무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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