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전(3) 배향공신 신숭겸 . 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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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05 10:28 조회1,590회 댓글0건본문
3)신숭겸 :?-927(태조 10). 고려 개국공신. 본관은 평산. 시호는 장절
신숭겸(申崇謙)?∼927(태조 10).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 열전에는 그를 광해주(光海州:현재 春川)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 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견훤(甄萱)이 신라에 대하여 공세를 펴게 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침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927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현재 永川)를 습격한 뒤 신라 왕도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 000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이때 신숭겸은 대장(大將)이 되어
보(元甫)·김락(金樂)과 같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태조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4)유금필 : ? - 941(태조 24). 고려 초기의 무장이며 개국공신, 본관은 평주. 시호는 충절
유금필(庾黔弼)
?∼941(태조 24). 고려의 무장. 평주(平州)사람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920년(태조 3) 3월 북계(北界)의 골암진(#골16巖鎭)이 거듭하여 북적(北狄)에게 침략당하자
개정군(開定軍) 3, 000명을 거느리고 가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성을 쌓고 북번(北蕃)의
추장 300인을 복종시켰다.
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하여 군사 3, 000여명을 살획하였다.
또한,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던 태조의 군사를 도와 견훤(甄萱)을
곤란하게 하였다.
928년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다가 후백제군사가 청주에서 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부수고 독기진(禿#기39鎭)까지 추격하여 300여기를 살획하였다.
929년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안동군)을 포위, 공격하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을 망설였으나
홀로 결사적인 태도로 임하여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돌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후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하므로 귀양지의
장정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하니, 태조가 그 충성에 감동하여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
933년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후백제군사로부터 신라의 서울을 구하라고 하므로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神劒) 등을 만나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장군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7인을 사로잡고 살획함이 매우 많았다.
934년 태조가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를 칠 때에는 경기(勁騎) 수천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명을 살획하였으며, 술사 종훈(宗訓)과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하였다.
935년 나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이를 경략하였으며,
이듬해 고려와 후백제가 결전을 벌일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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