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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49) 민족에 내놓은 몸 15. 진기한 일도 많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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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05 10:30 조회1,5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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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진기한 일도 많으나...

대한민국(大韓民國) 2년에 아내가 인(仁)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님이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信)이 났다.

나의 국모(國母) 보수 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 구가 김창식이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 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국민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 하랴.

민국 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샹해 보륭의원(寶隆醫院)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 폐병원(虹口肺病院)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 의원에서 한 마지막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고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法界 嵩山路)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 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婚喪)은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그 중에 유세관(柳世觀) 인욱(寅旭) 군은 병원 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는 어머님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은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님은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님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년 11월에 나는 국무령(國務領)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 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元首)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固辭)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하여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 갑(金甲), 김 철(金澈), 이규홍(李圭洪)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항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60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언마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 : 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 - 편집자 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간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 유(韓愈)는 '송궁문(送窮文 : 가난을 보내는 글 - 편집자 주*)'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友窮文 : 가난을 벗하는 글 - 편집자 주*)'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 2월 26일이 어머님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님의 수연(壽宴)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님이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에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님이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독립 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님을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羅錫疇)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님을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을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님의 화연(花宴-환갑 잔치)을 못해 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하다 하기로 신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吉林)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漢卿)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李種根)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李雲龍)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의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의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님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일(半日)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노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 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년 5월 3일에 임시 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상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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