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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선조님 친필 현판 - 권무당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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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08-12 12:42 조회2,1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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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5일 포항에서 전 포항문화원 사업과장 이정업 선생께서 김영수 선조님의 흥해군수 재임시에 이루어 졌던 각종 역사 자료를 모은 자료집 1권을 보내 주셨습니다. 흥분과. 설레임으로 개봉하면서 이정업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라 홈페이지에 하나 하나 옮겨서 소개 합니다.

1. 권무당기(勸武堂記)
l 본 기문은 김영수군수가 짓고 쓰신 친필 현판임(권무정을 창건하고 2년뒤 현판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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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당기(勸武堂記)
옛날 택실(澤室)에서 무사를 선발하되 반드시 활쏘기를 하였으니 그 활쏘기는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중의 일예(一藝)로서 군자(君子)의 덕행을 관찰하는 바라, 지금 사례(射禮)가 쇠(衰)하고 문무(文武)의 도(道)가 다르나 아직 옛것을 본 받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당연한즉 무릇 인재(人才)를 양육하여 그 재목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는 가히 한쪽을 폐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고을이 바다를 낀 신령(神靈)한 지대로 권무(勸武)의 행정을 더욱 소홀히 못할 것이다. 불민한 내가 이 고을을 맡은 이래로 먼저 권학(勸學)을 염두에 두고 인재를 뽑아 학당에 모으고 장노(長老)에게 맡겨 일과(日課)를 가르치게 하고 세입을 감독하여 그 수요와 공급을 풍족하게 하니 삼자(三者)의 행정이 다사(多事)에게 저버리지 않았다. 이어 여가를 내어 관내의 무사들에 대한 사열(査閱)을 실시했던 결과 모두 재주는 성취 할만하나 자력으로 그 게으름을 이기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다. 내가 이를 민망히 여겨 계획을 짜서 권장하게 하려니까 또한 무술을 익히는 장소가 있어야 뜻이 있는 자가 연습을 할것이며 시상제도가 있어야 재주있는 자가 분발할것이므로 고을의 여러 인사(人士)들과 의논하여 동전이백민(二百緡)을 협찬받아 하명자에게 명하여 각처의 사계(射契)에 보조후 원금은 보존하고 이식(利殖)을 납부토록 하여 매월 일차 궁술대회 때 그 이자 십민(十緡)으로 우수 무사에게 시상을 하도록 하고 또 그에 마땅한 준칙을 정한 후에 비로소 사당(弓道場)을 군성(郡城)의 남쪽 들에 세우니 권무당이 앞으로 백년 동안은 유지 될것이며 이자(利子)로서 매월 시상(施賞)을 하면 이로 인하여 이 고을 추향자(趨向者)의 의사에 부흥 할것이다.
낙성식을 하던날 모든 궁사들을 모은 자리에서 내가 말하기를, 무술을 연마하여 성공을 거두는 것은 제군들의 몫이니 채찍을 않아도 노력하고 권함을 기다리지 말 것이다. 또 권해도 분발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하는 자니 내가 어찌 꾸짖겠는가. 다만 무술이란 매우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좋은 결과를 볼것인즉, 나는 오늘 이 일에 시작을 마련했을 따름이니, 제군들은 나의 이 작은 뜻을 깊히 자각하고 유종의 미를 거둔다면 후세 사람들의 바라봄이 있으리라.
세계미계하옥동귀인식(歲癸未季夏玉洞歸人識)

*권무당창건년대-------------------신사년 영조37(1761)
*김영수군수의 권무당기 현판년대---계미9월영조39년(1763)

<주>
택실(澤室)---궁도장
장노(長老)---훈장(訓長)
삼자(三者)---문(文). 무(武). 농(農)
(꿰미민)---엽전꿰미(한꿰미=25兩)
사계(射契)---소규모 궁도장
추향자(趨向者)---고을의 수장(흥해군수)
歲癸未季夏玉洞歸人識---1)歲癸未季夏: 영조39(1763년)6월하순(늦은여름)
                                  2)
玉洞歸人識: 김영수 군수가 모든 공직을 마감하는 날 고향 옥동으로 돌아 간다는 뜻(파주의 옥동)

전 포항문화원 사업과장 李正業 先生의 辯
筆者가 金 令公의 親筆懸板을 발견한 3点(勸武堂記-耽羅形勝-制勝堂)중에서 젊은 興海郡守 時에 쓰신 細筆懸板으로, 敢히 韓石奉 先生의 필적과 견주어 보기도 했다. 훌륭한 김영수 군수의 친필현판을 간직한 우리 勸武亭의 位相을 높이는 重要 遺蹟이고 遺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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