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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53) 3.1운동의 상해 3. 공산주의자와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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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8-23 17:07 조회1,5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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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산주의자와의 대립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철도 각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 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은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백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니 2백만 루블을 한국 임시 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 차 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 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 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 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廣東)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 대표 대회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安秉贊), 여운형(呂運亨)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크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福本和夫)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金俊淵) 등의 엠엘(ML)당 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두 형제와 유자명(柳子明)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 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크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크파는 창조론(創造論), 상해파는 개조론(改造論)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歸一 : 하나로 합쳐지는 것 - 편집자 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 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 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 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計不入量 : 따져도 도무지 양에 차지 않음 - 편집자 주*)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느이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 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 모략에 현혹되어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 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 정부 공금 횡령범 김 립은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임시 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를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 효과가 없어서 임시 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 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 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 동맹(在中國靑年同盟), 주중국 청년 동맹(住中國靑年同盟)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도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 혁명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 운동보다 민족 독립 운동을 먼저 하여라' 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 독립 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 독립 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 독립이 공산당의 당시(黨是)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 독립당 촉성회(唯一獨立黨促成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 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로 이를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이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 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긴 것이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李裕弼), 차이석(車利錫), 김붕준(金朋濬), 송병조(宋秉祚) 및 나 김 구가 수뇌가 되어서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서 민족 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李尙龍)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 - 아버지 죽이는 회 - 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 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남군정서(南軍政署), 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 김좌진(金佐鎭), 김규식(金奎植) - 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이 아니다 - 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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