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풍산 소산리 청원루 소개-영남일보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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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6-08-30 13:17 조회1,766회 댓글0건본문
한국의 혼 樓亭 .12] 청음 김상헌의 안동 풍산읍 '청원루' | |||||||||||||||||
"청나라 멀리하라" 피맺힌 애국혼 서려
인조때 항복국서 찢고 자결시도 척화파 거두, 71세때 淸에 끌려가 갖은 고초 6년 만에 귀국
장동김씨 종택에 현판 내걸고 와신상담 은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은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와 항복의 화의가 성립되자 임금 앞에서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자결의 뜻도 못이루자, 조향(祖鄕)인 안동 풍산읍 소산리의 청원루(淸遠樓)에 내려와 은거했다. 청원루에 머물다 그 사건으로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서울을 지나면서 읊었던 애국충절의 시조다.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낙향한 청음 청음은 평소 경기도 양주 석실(石室)에서 거처했기 때문에 병자년 이후에는 석실산인(石室山人)으로 호를 고쳐 썼다. 안동 도정(都正: 조선시대 정3품 벼슬)을 지낸 김극효의 셋째 아들이며, 당대의 명신이자 대학자였던 월정(月汀) 윤근수의 제자이다. 또한 임당(林塘) 정유길, 맏형 김상용에게도 수학하였고 현헌(玄軒) 신흠, 월사(月沙) 이정구 등과 공부했다. 선조 29년(1596)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했고, 중국 사신으로 가서 당대의 석학들과도 교유했다.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청 태종은 당시 의주부윤인 임경업 장군이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단 10여일 만에 서울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종묘의 위패는 강화도로 피란해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하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청음은 백방으로 방어와 공격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통곡을 하며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렸다. 군신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었다. 끝내 청음 등이 주장하는 척화론이 좌절되고,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지천(遲川) 최명길 등이 찢어버린 국서를 다시 붙여 항복하기로 결론지어졌다. 결국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항복하게 된다. 한편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청음의 맏 형인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은 적병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함락하게 되자 적들에게 무기를 내주지 않기 위해 화약고에 불을 질러 순절하였다. 청음은 이런 상황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자결의 뜻도 좌절되자,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수복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고 안동 소산리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 후 국서사건에다 척화파의 영수로 지목돼 71세의 고령으로 청나라 선양에 끌려가 갖은 고초와 심문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니 청나라에서도 충신의 절의에 감복해 죽이지를 못했고, 6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의 '청원루'를 내걸고 손자들 교육 청원루는 안동시내에서 50여리 떨어진 풍산들 북쪽에 위치한 소산리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소산리 앞에 펼쳐진 비옥한 풍산평야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이곳의 입향조는 안동 김씨 시조로부터 8세손이 되는 김혁(金革)의 세 아들(三近·三益·三友) 중 삼근이다, 의성의 비안 현감을 지낸 삼근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계권(係權)은 한성부 판관을 지냈고, 둘째 계행(係行)은 호를 보백당(寶白堂)이라 하며, 대제학을 지냈다. 두 형제는 벼슬생활로 한양에 거주했으나 계권이 별세한 후 그의 부인 예천권씨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소산리로 낙향했다. 계권의 5형제 중 막내인
청원루는 장동김씨 시조인 김번(1479~1544)이 지은 살림집으로 장동파 종택이었다. 김번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김생해이고, 그의 아들이 도정을 지낸 김극효이다. 김극효가 청음의 부친이다. 청음은 병자호란 후 이 집으로 들어와 보수를 하고, '청원루'란 현판을 걸었다. '청원(淸遠)'은 본래 '산수가 맑고 세속을 멀리한다(山水淸且遠)'는 뜻과 '애련설'의 '향기 멀수록 더욱 맑다(香遠益淸)'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청음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로는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황하문명의 정화를 수입해 우리 문화로 소화한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힘으로 밀고 들어와 정복한 '오랑캐문화'의 청나라에 대해 형제국으로 국교를 수립할 수는 있어도 군신간의 국교는 수립할 수 없거니와 오랑캐문화의 지배에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학자들의 소신이었다. 청음이 양주 석실에서 줄곧 머물다 국서사건 이후 청원루에 내려가 있을 때 손자 셋을 데리고 와 글공부를 시킨 일은 특히 유명하다. 손자들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손 수증(壽增)은 성천부사를 지냈고, 둘째·셋째 손자인 수흥(壽興)과 수항(壽恒)은 둘 다 사마시에서 장원을 했고, 수항은 문과 장원도 차지했다. 이 두 형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증손자 창집, 창협, 창흡, 창업이 모두 큰 학자였다. '청원루의 자손'으로도 불리는 세칭 장동김씨 후손들은 '금관자(金貫子) 서말이 나온 집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그 중 청음 자손들의 벼슬길 진출이 두드러져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15명의 정승과 51명의 판서 등을 배출했다. 장동김씨는 특히 조선 후기 60년 세도정치를 이끈 주역들로 활약했다. 청음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저술은 청음이 직접 편집해놓은 초고를 손자인 수증, 수흥, 수항 등이 약간 보완해 간행한 40권 6책의 '청음집'이 전하고 있다. 현판 글씨 회곡 조한영 친필? 판독 오류로 잘못 알려진 듯 청원루 현판은 근년에 청음의 후손으로 한국 서단의 원로인 여초(如初) 김응현씨가 새로 써서 달았으나 문중에서 글씨가 경박하다하여 떼어내고, 현재는 본래 전하던 옛 현판을 다시 달아놓고 있다. 옛 현판 글씨에 대해 후손들이 만든 청원루 소개 책자에는 회곡(晦谷) 조한영(曺漢永: 한성부좌윤)의 글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한학자 이갑규씨가 현판 글씨를 감별해본 결과 송나라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판명했다. 초서로 된 '회옹(晦翁)'의 '옹(翁)'자를 '곡(谷)'자로 잘못 판독한 데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회곡 조한영의 글씨라는 증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청원루를 관리하고 있는 청음의 15세손인 김창년씨(73)도 기록이나 근거가 있어 회곡 조한영의 글씨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오류로 보여진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인 청원루는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 규모였으나 1934년 홍수로 무너지고 한 채만 남아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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