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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55) 3.1운동의 상해5. 이봉창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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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5 12:47 조회1,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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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봉창과의 만남

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 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재류 동포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朴容萬)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나는 영문에는 문맹이므로 편지 겉봉도 쓸 줄 몰랐으므로 엄항섭, 안공근 등에게 의뢰하여서 쓰게 하였다.

이 편지 정책의 효과를 기다리기는 벅찼다. 그 때에는 아직 항공 우편이 없었으므로 상해 미국간에 한 번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받으려면 두 달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차차 동정하는 회답이 왔고, 시카고에 있는 김 경(金慶)은 그곳 공동회(共同會)에서 모은 것이라 하여 집세나 하라고 미화 2백 달러를 보내어 왔다. 당시 임시 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려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김 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와이에서도 안창호, 가와이(加蛙伊), 현 순(玄楯), 김상호(金商鎬), 이홍기(李鴻基), 임성우(林成雨), 박종수(朴鍾秀), 문인화(文寅華), 조병요(趙炳堯), 김현구(金鉉九), 황인환(黃仁煥), 김윤배(金潤培), 박신애(朴信愛), 심영신(沈永信)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위하여 정성을 쓰기 시작하고,

미주에서는 국민회에서 점차로 정부에 대한 향심이 생겨서 김호(金乎), 이종소(李鍾昭), 홍 언(洪焉), 한시대(韓始大), 송종익(宋鍾翊), 최진하(崔鎭河), 송헌주(宋憲 ), 백일규(白一圭) 등 제씨가 일어나 정부를 지지하고, 멕시코에서는 김기창(金基昶), 이종오(李鍾旿), 쿠바에서는 임천택(林千澤), 박창운(朴昌雲) 등 제씨가 임시 정부를 후원하고, 동지회 방면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하여 이원순(李元淳), 손덕인(孫德仁), 안현경(安賢卿) 제씨가 임시 정부를 유지하는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 - 도산이 아님 - 임성우 양씨는 내가 민족에 생색날 일을 한다면 돈을 주선하마 하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한 사람이 거류민단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이봉창(李奉昌)이라 하였다 - 나는 그 때에 상해 거류민단장도 겸하였다 -.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일본서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 운동에 참예하고 싶어서 왔으니 자기와 같은 노동자도 노동을 해먹으면서 독립 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그는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고 임시 정부를 가정부(假政府)라고 왜식으로 부르므로 나는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민단 사무원을 시켜 여관을 잡아주라 하고 그 청년더러는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또 만나자 하였다.

며칠 후였다. 하루는 내가 민단 사무실에 있노라니 부엌에서 술먹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청년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당신네들은 독립 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이 말에 어떤 민단 사무원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가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죽이오?"

한즉 그 청년은,

"내가 작년에 천황이 능행(陵幸)을 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서 보았는데, 그때에 나는 지금 내 손에 폭발탄 한 개만 있었으면 천황을 죽이겠다고 생각하였소"

하였다.

나는 그날 밤에 이봉창을 그 여관으로 찾았다. 그는 상해에 온 듯을 이렇게 말하였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 씨의 이 말에 내 눈에는 눈물이 찼다.

이봉창 선생은 공경하는 태도로 내게 국사에 헌신할 길을 지도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그러마 하고 쾌락하고 1년 이내에는 그가 할 일을 준비할 터이나 시방 임시 정부의 사정으로는 그의 생활비를 댈 길이 없으니 그 동안은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철공에 배운 재주가 있고 또 일어를 잘하여 일본서도 일본 사람으로 행세하였고 또 일본 사람의 양자로 들어가 성명도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 하여 상해에 오는 배에서도 그 이름을 썼으니 자기는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면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며 언제까지나 나의 지도가 있기를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그에게 나하고는 빈번한 교제를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밤에 나를 찾아와 만나자고 주의시킨 후에 일인이 많이 사는 홍구로 떠나보내었다.

수일 후에 그가 내게 와서 월급 80원에 일본인의 공장에 취직하였노라 하였다.

그후부터 그가 종종 술과 고기와 국수를 사 가지고 민단 사무소에 와서 말단 직원들과 놀고 술이 취하면 일본 소리를 잘하므로 '일본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어느 날은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 와 약속한 1년이 거의 다 가서야 미국에 부탁한 돈이 왔다. 이제는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 웅(王雄)을 시켜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핮ㄴ 개는 김 현(金鉉)을 하남성 유 치(劉峙)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의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 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 돈이 든 줄을 하는 이가 없었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밀히 법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실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서 돈 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좋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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