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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23)부사공(김명리)사위 남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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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5 12:45 조회1,4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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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김명리)께서는 삼남4녀늘 두셨습니다.

장자는 직제학공(김맹헌)차자는 참의공(김중서) 막내는 사인공(김계우)

장녀는 안동인 권탄, 2녀는 의령인 남경복, 3녀는 광산인 김철산, 4녀는 화순인 최문선에게 출가하셨습니다.

 

첫째 사위는 안동권씨이며 아버지는 헌납을 역임한 권보장, 아들은 현감 권국, 호군 권광, 판서 권빈, 현감 권포를 두셨습니다.

 

둘째 사위는 의령인 남경복이며 판서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경복의 아버지는 조선태조(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1등에 봉해진 남은, 남은의 형이 바로 영의정을 역임한 남재입나다.

 

 

남경복의 아버지 남은

 

남은(南誾)
1354(공민왕 3)∼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의령.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 형은 영의정 재(在), 아우는 우상절도사(右廂節度使) 지(贄)이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급제, 1380년(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고 이어서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가 되어 왜구를 격퇴, 사복시정에 올랐다.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사류로서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중심인물이 되어 구세력에 대립, 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조인옥(趙仁沃) 등과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 회군 뒤에는 이성계의 왕위추대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응양군상호군 겸 군부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로 승진하였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조박(趙璞)·정도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정도전·조준·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 조선을 개국하게 하였다.
조선 건국 뒤 판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책록,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으며, 전(田)2백결과 노비 25구를 하사받았다.
1393년(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軍籍)을 새로이 작성하였으며,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가 되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하였다.
1395년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형인 재와 함께 기복(起復)되어 이듬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정조사(正朝使)의 표문(表文)이 명나라 태조의 비위를 거슬려 사신 정총(鄭摠)이 살해되고 그 글의 초안자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정도전과 은밀히 의논, 군량을 비축하고 진도(陣圖)를 작성하는 등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태조를 도와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하였다가, 1398년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심효생(沈孝生) 및 아우 지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1421년(세종 3)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남재=남경복의 큰아버지

 

남재(南在)
1351(충정왕 3)∼1419(세종 1).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본관은 의령. 초명은 겸(謙), 자는 경지(敬之), 호는 구정(龜亭).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의 아들이며, 은(誾)의 형이다.
1371년(공민왕 20) 진사시에 제5등으로 합격하였다. 아우 은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에 가담하여 고려 조정의 신진사류로서 구세력과 대립하였다.
1389년(공양왕 즉위년) 우사의(右司儀)가 되고, 1390년 판전교시사 겸 집의(判典校寺事兼執義)가 되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윤소종(尹紹宗)과 함께 비록 행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사직(社稷)의 대계(大計)를 의논하고 그 계책을 도왔다.
그 공으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봉하여지고, 곧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로서 양광도(楊廣道)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전지(田地) 170결(結)과 노비 20구를 하사받았다.
1393년(태조 2)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사이가 좋지 않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 태조로부터 3년에 한 차례씩 조공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공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고, 그 다음해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가 되었다.
1395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은거하니, 동생 은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에 임용되고,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의 판사를 맡았다.
1396년 예문관춘추관태학사(藝文館春秋館太學士)로서 도병마사가 되어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 김사형(金士衡)을 따라서 이키도(壹岐島)·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398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정안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태종이 즉위하자 세자의 서연관(書筵官)에 빈객(賓客)이 되었다.
1403년(태종 3)경상도도관찰사가 되어 시무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대로 시행하였고, 1404년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1408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1414년 우의정·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제배(除拜)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서 과거를 관장하여 권도(權蹈)·성개(成漑) 등을 시취(試取)하였고, 또 하륜(河崙)과 함께 《고려사》를 개수하였다. 그해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1415년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수문전대제학 겸 세자부(修文殿大提學兼世子傅)가 되었다.
141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사면하였다.
1419년 12월 14일에 죽으니, 나라에서 조회(朝會)와 저자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리고 세종이 직접 조문하였다.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 문장이 평정(平正)하고 아름다웠으며, 산술에 두루 통하여 누구도 풀 수 없는 것을 풀어내었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남산(南算)’이라고 불렀다. 조선 태조의 묘정(廟庭)에 추가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정유고 龜亭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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