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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24)부사공(김명리)셋째사위 광산김씨 김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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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7 10:07 조회1,6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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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김명리)의 셋째사위는 광산김씨 김철산입니다.

김철산은 관직이 직장이지만 아내(안동김씨)와 함께 아들들을 흘륭히 키워 이후 광산김씨가 명문거족이 되었습니다.

 

큰아들 김국광은 좌의정, 작은아들 김겸광은 좌찬성이 되었고

그 후손이 바로 조선예학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사계 김장생,이며 이후 광산김씨가 조선의 최고명문가가 되었습니다.

이후 사계의 아들 김집, 그리고 그후손 김만중, 김춘택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재가 배출된 집안은

모두 부사공(김명리)의 따님의 자손들입니다.

 

김국광(金國光)
1415(태종 15)∼1480(성종 11). 조선시대의 문신·공신. 본관은 광산.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사헌부감찰 철산(鐵山)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박사에 이르고, 1445년에는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이어 황해도도사·성균관주부·사헌부감찰·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역임하였다.
1448년 4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이사임(李思任)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세조 1) 12월에는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당시 할머니의 상을 입고 있었으나 이듬해 복을 벗고 사헌부지평으로 임명되었다.
1458년 4월 최옥산(崔玉山)의 살부사건(殺父事件)이 일어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내는 데 공을 세워, 세조의 신임을 얻게 되어 사헌부장령에 임명되고, 이어 성균사예(成均司藝)·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역임하였다.
1460년 사섬시윤(司贍寺尹)에 임명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편찬을 주도했으며, 그해 10월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세조는 그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직접 ‘사지제일(事知第一)’의 4자를 써서 하사하고, 당시 승지들이 모두 탄핵을 받자 가도승지(假都承旨)로 임명하여 왕명출납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1464년 10월 호조판서를 거쳐 이듬해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고, 1466년 4월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7년 4월 우참찬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책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훈봉되는 동시에 좌찬성 겸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병조판서·오위도총부도총관·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에 올랐으며, 이어 행해진 건주위(建州衛)정벌에도 공을 세워 군공(軍功)3등에 책훈되었다.
1469년 세조가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으나, 그해 10월에는 겸병조판서에서 해임되고 좌찬성으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이듬해 5월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문폐사(問弊使)로 내려가 여러가지 폐정 시정에 노력했으며, 8월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4월 좌의정으로 옮기고 5월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에 책훈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8월 그의 아우 정광(廷光)과 사위 이한(李垾)의 부정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만 원상과 영경연사(領經筵事)만을 겸했다.
그뒤 사헌부·사간원 등 대간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면서도 1476년 5월 원상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원상으로서 국방·외교·법전편찬 등의 국정자문에 응하고 경연관으로서 국왕보도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1477년 10월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6월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심한 반발로 사직하였다.
일찍이 세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경국대전》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김겸광(金謙光)
1419(세종 1)∼1490(성종 2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위경(撝卿). 아버지는 증영의정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고, 그뒤 감찰·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460년(세조 6) 장령에 승진되었다.
같은해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군기시정에 올랐으며, 이듬해 지병조사(知兵曹事)에 이어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65년 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궐원이 된 평안도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를 받아 승진, 임명되었다.
1467년 예조판서에 승직되었고,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469년(예종 1)에 예조판서에 재임되었다.
1471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광성군(光成君)에 봉해지고, 1475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황해도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황해도진휼사가 되었고,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례를 주관하였으며, 창경궁과 세자궁 중수의 책임을 맡아 처리하였다.
1484년 좌참찬을 거쳐 1486년 세자좌빈객이 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받아 건주위야인 토벌을 비롯하여 평안도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내면서 세조의 국방정책에 기여한 바 컸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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