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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56) 3.1운동의 상해 6. 불행히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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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08 15:45 조회1,4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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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불행히 맞지 않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서 함께 잤다. 그 때에 이 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으로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내가 이 돈을 떼어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길로 나는 그를 안공근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선서식을 행하고 폭탄 두 개를 주고 다시 그에게 돈 3백 원을 주며 이 돈은 모두 동경까지 가기에 다 쓰고 동경 가서 전보만 하면 곧 돈을 더 보내마고 말하였다. 그리고 기념 사진을 박을 때에 내 낯에는 체연한 빛이 있던 모양이어서 이 씨가 나를 돌아보고,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박읍시다"

하고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띤다. 나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 사진을 박었다.

자동차에 올라앉은 그는 나를 향하여 깊이 허리를 굽히고 홍구를 향하여 가버렸다. 10여 일 후에 그는 동경에서 전보를 내었는데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곧 2백 원을 전보환으로 부쳤더니, 편지로 미친 놈처럼 돈을 다 쓰고 여관비, 밥 값이 밀렸던 차에 2백 원 돈을 받아 주인의 빚을 청산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하였다.

당시 정세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독립 사상을 떨치기로 보거나 또 만보산 사건, 만주 사변 같은 것으로 우리 한인에 대하여 심히 악화된 중국인의 악감을 풀기로 보거나 무슨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임시 정부에서 회의한 결과 한인 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암살과 파괴 공작을 하되 돈이나 사람이나 내가 전담하여 하고 다만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1월 8일이 임박하므로 나는 국무위원에 한하여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여 두었었다. 1월 8일 중국 신문에,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中'
(이봉창이라는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맞지 않았다)

이라고 하는 동경 전보가 게재되었다.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다는 것은 좋으나 맞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극히 불쾌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은 나를 위로하였다. 일본 천황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만은 못하나 우리 한인이 정신상으로 그를 죽인 것이요, 또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번 일은 성공으로 볼 것이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지들은 내 신변을 주의할 것을 부탁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조조에 프랑스 공무국으로부터 비밀히 통지가 왔다. 과거 10년 간 프랑스 관헌이 김 구를 보호하였으나 이번 김 구의 부하가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데 대해서는 일본의 김 구 체포 인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靑島)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이봉창이란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았다)

이라고 썼다 하여 당시 주둔 일본 군대와 경찰이 그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밖의 장사(長沙) 등 여러 신문에서도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문구를 썼다 하여 일본이 중국 정부에 엄중한 항의를 한 결과로 '불행(不幸)' 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해에서 일본 중 하나가 중국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일본은 1.28 상해 사변을 일으켰으니, 기실은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의 '불행부중'이라고 말한 감정이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인 것이었다.

나는 동지들의 권에 의하여 낮에는 일체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의 집이나 창기의 집에서 자고 밥은 동포의 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들은 정성껏 나를 대접하였다.

십구로군의 채정해(蔡廷楷)와 중앙군 제5군장 장치중(張治中)의 참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상해 싸움은 가장 격렬하게 되어서 법조계 안에도 후방 병원이 설치되어 중국측 전사병(戰死兵)의 시체와 전상병(戰傷兵)을 가뜩가뜩 실은 트럭이 피를 흘리고 왕래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언제 우리도 왜와 싸워 본국 강산을 피로 물들일 날이 올까 하고 하도 눈물이 흘러 통행인들이 수상히 볼 것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피해 버렸다.

동경 사건이 전해지자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오고 그 중에는 이번 중일 전쟁(中日戰爭)에 우리도 한몫 끼여 중국을 도와서 일본과 싸우라는 일을 하라는 이도 있고 적당한 사업을 한다면 거기 필요한 돈을 마련하마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중일 전쟁에 한몫 끼이근 임갈굴정(臨渴掘井 : 목이 마른 뒤에야 우물을 팜. 일을 너무 다급하게 서두는 것을 말함.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우물 가서 숭늉 찾기'라고나 할 것 같다 - 편집자 주*)이라 준비도 없이 무엇을 하랴.

나는 한인 중에 일본군 중에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연소탄을 장치하여 이것을 태워버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송호 협정(淞 協定)으로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여 상해 전쟁이 끝을 막으니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호 협정의 중국측 전권은 곽태기(郭泰祺)였다.

이에 나는 암살과 파괴 계획을 계속하여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였다. 내가 믿던 제자요, 동지인 나석주(羅錫疇)는 벌써 연전에 서울 동양 척식 회사에 침입하여 7명의 일인을 쏘아 죽이고 자살하였고, 이승춘(李承春)은 천진에서 붙들려 사형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을 생각하여도 하릴없다.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本庄繁)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尹奉吉)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 진(朴震)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고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에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큰 뜻이 있는 것을 보고 기꺼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중이니 안심하시오."

그러고 나는 왜놈들이 이번 상해 싸움에 이긴 것으로 자못 의기양양하여 오는 4월 29일에 홍구 공원에서 그놈들의 소위 천장절(天長節) 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한다 하니 이때에 한 번 큰 목적을 달해봄이 어떠냐 하고 그 일의 계획을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더니 윤 군은,

"할랍니다. 이제부텀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준비해 줍시오"

하고 쾌히 응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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