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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묘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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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06-27 17:02 조회2,6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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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 할아버지의 묘와 관련된 내용을 족보에서 발췌하여 게재하여 보았습니다.







⊙ 충렬공 묘지문 (1300, 이진 찬)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영구가 떠날때는 삼관녹사 80여명이 모두 소복으로써 제사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때 공을 미원하는 간신들 무리의 모사로 예장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이 이를 후회하고 1307년 (충렬왕33) 6월 14일에 왕이 영지를 내려 이르되 "고 상락공 김방경은 공이 많은지라 대려와 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기 어렵다" 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 충렬공 묘갈 (1602, 대구도호부사 이시발 찬, 조우인 서)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에 있으며







⊙ 충렬공 신도비문 (1971, 학술원장 이병도 근찬, 후세손 사달 근서)



공은 치사한 뒤에도 우국여가 대사가 있을때는 반드시 왕의 자문을 받더니 1300년 (충렬왕26) 8월 16일에 향년 89세로 졸하여 조야가 모두 통찬하니라.



1307년(충선왕 즉위초)에 왕지를 내려 "고 상락공은 사직에 유공함이 대려와 같다" 하여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고 명하여 신도비를 세우게 하다



(주) 그 당시의 신도비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지고 그후 379년동안 재건치 못하고 내려오다가 서기 1971년 11월 26일에 안동군 녹전면 구송동 산117-3에 여러 특지종인들의 성력에 의하여 재건하였다.









⊙ 대종회 연혁



1990년 7月23日 忠烈公 묘소가 四百餘年間 光山金氏 종산에 모셔져 있어 泰亨 會長께서 崙會氏와 같이 安東에 내려가 都評議公派 冕鎬씨를 만나 光山金氏 종회장을 尋訪하여 祿田面 九松洞 산19番地 忠烈公墓域 二百九十九坪을 讓渡키로 합의하여 우리 산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우리는 光山金氏 문중에 고맙다는 뜻으로 金一千萬원을 희사하였다.



7月 23日 묘역 확장 축대 및 계단 축조 공사를 二千七百五十萬원을 들여 동시에 착공하여 단기간내 훌륭히 완공하니 數 百餘年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이에 泰亨會長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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