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로마 신라를 다시 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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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06 20:51 조회1,767회 댓글0건본문
좌담 - 경주 고분의 주인공들(신라통일 주체세력의 직계 선조)은 누구인가?
1500년 전 新羅김씨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모양의 독창적 金冠을 쓰고, 트라키아王이 선물한 黃金칼을 찼
으며, 하얀 西域産 天馬로 달리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숭배했다. 地中海 연안에서 제작한 예술적 유리병
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면서 페르시아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들. 東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세
계와 國交 수준으로 교류, 지구 반대편 문물과 사유체계를 받아들인 新羅人은 어떤 사상적 고향을 가진
種族인가.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노하우의 비밀을 추적한다
좌담 참석자
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941년 서울 출신. 서울大 美學科 졸업. 독일 쾰른大 미술사학 철학박사. 고려大 교수, 중앙아시아 학회장
(現),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학과장(現).
金秉模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1940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포드大 문학박사. 한양大 박물관 관장, 한양大 문
과대 학장, 한국고고학회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委 위원장(現),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現).
申瀅植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1939년 충북 충주 출신. 서울大 사범대 역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이화여大 사학과 교수(現), 한국고대학
회장(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現).
李仁淑 前 경기도 박물관 관장
1949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고고학 미술사 박물관 박사. 문화재청 전문위원(現), 경기
도 박물관 관장, 서울大 고고미술사학과 강사(現).
사회·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일시: 2002년 1월31일 오후
장소: 月刊朝鮮 대표실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노골적으로 고구려 중심주의와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삼국
시대의 주역이고 백제와 신라는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전사」나 「조선통사」에는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南進(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백제와
신라의 北進(북진)정책은 그 지배층의 탐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학계는 7세기의 신라가 唐과 연
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배신행위로 규정합니다.
李仁淑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적 배신행위」라는 북한 역사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주장은 객관적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하나
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낡은 생각이 아직도 나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상의 삼국시대는 원
래 하나의 국가가 셋으로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청동기시대 이후 수백 개의 城邑國家(성읍국가)가 나타
났고, 그것들이 다시 전쟁과 동맹을 통해 광역의 영토국가인 신라, 고구려, 백제로 정리된 것입니다.
權寧弼 북한의 역사책에서 고구려는 선진문화의 창조자와 전파자로서 기록하는 반면 신라는 후진사회이
고 그 지배층은 삼국 간의 경제·문화적 교류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
을 벌여 동족에 대한 더 많은 억압과 착취를 꾀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갇혀 있던
「후진사회」라는 주장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모략입니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東아시아의 선
진사회인 중국 쪽의 문화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의 신라는 북방 스텝 루트(초
원의 길)를 통해 서방세계의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최근, 흥미롭게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
던 것은 로마문화 수용시대에 축적된 에너지 때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平壤을 민족사의 중심에 두려는 억지 攻勢
사회 북한의 역사 조작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북한은 평양 근교에서 檀君陵(단군릉)
과 檀君 뼈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단군 뼈를 전자상자성공명연대(ESR)에 의해 수십
번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267년 전의 뼈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이선복 교수는 그런 주장에 대해 기본적인 논리구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증거의 제시에 있어서
도 전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李仁淑 그 무덤 안에서 발견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檀君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은 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청동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란 놀라운 기술을 가
지고 있었다는 억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BC 12∼10세기에 개막됩니다. 소위 「단군
릉」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5∼6세기 고구려의 어느 유력자 부부의 합장 무덤일 것입니다.
權寧弼 그것은 민족사의 중심을 평양으로 설정하려는 소위 주체사학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지나지 않습
니다. 학문적 관점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인 정치선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단군조선
에 대한 북한의 그런 주장을 남한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회 금년 들어 KBS TV가 檀君陵(단군릉)뿐만 아니라 東明聖王陵(동명성왕릉)에 관한 대형 특집 프로그
램을 잇달아 방영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非학문적인 북한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무시해야 마땅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영방송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릉뿐만 아니라 동명성왕릉에도 문제
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東明聖王의 무덤은 平壤 천도 이후에도 옮겨지지 않고 舊
都인 集安(집안)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
위 「단군릉」과 「동명성왕릉」을 참배하면서 五體(오체)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는 큰절까지 올리고 있
습니다. 절(寺) 모르고 시주하는 格이죠.
申瀅植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형성의 틀이 거의 완
성된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기반이 확고해진 것이죠.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장의 전국시대였
습니다. 피를 피로 씻는 수백년 간의 亂世(난세)를 治世(치세)로 바꾸었다는 것만으로 삼국통일은 역사
의 큰 발전입니다.
權寧弼 통일신라는 당시의 슈퍼파워 唐제국과 함께 선진문화권을 형성, 민족문화를 한 단계 높인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 맞은 황금기였습니다.
신라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 양식
사회 경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경주시내로 진입하면 옛 무덤들이 숱하게 눈에 띕니다. 이 무덤들이 호
화무비의 세계적 명품인 금관과 황금칼, 로만 글라스가 쏟아져 나온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
무덤)인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입니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신라왕이 麻立干(마립간)으로 불리던 시기(4∼6세기)의 무덤들입니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립니
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됩니다. 신
라 金씨들은 그런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
으로 半球形(반구형) 봉분을 한 겁니다.
사회 金선생님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 추장 묘역인 이씩(Iccyk) 지역의 쿠르간(Kurgan=적
석목곽분)群을 둘러보셨죠? 경주의 대릉원과 비교하면 어떻습디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 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게 마련
입니다. 그 모양은 경주의 고분들과 같았지만 규모면에서 훨씬 크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스키타이족의 쿠르간들은 비 온 다음날의 개미굴처럼 수백 개가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權寧弼 스키타이族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黑海(흑해) 지역에서부터 천산산맥 사이에 위
치한 넓은 초원지대에서 농업과 유목을 경제수단으로 삼아 생활했습니다. 스키타이는 유별나게 황금을
사랑했습니다. 「스키타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붙인 것이고, 그 후손들인 유목민들은
자신들을 사카(Saka)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黑海를 통해 그리스인들과 교역하면서 그리스 제품인 황금물품을 많이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러
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그 당시 만들어진 물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1년 한국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展」에서 전시된 것은 바로 이 유물들입니다. 이것들 중에 戰士
두 명이 角杯(각배) 하나로 술을 나눠 마시는 작품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이
씩 쿠르간(적석목곽분)에서 발굴된 黃金人間은 금을 사랑하던 스키타이人들의 풍속을 잘 보여 주었습니
다.
신라 金문화의 한 뿌리는 헬레니즘
李仁淑 스키타이人들은 황금을 사랑했지만 황금을 다루는 기술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용맹했던 스키
타이人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동물 무늬와 풍습이 조각된 황금제품을 그리스人들에게 주문하기도 했거든
요. 현대 비즈니스 용어로 말하면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입니다. 그리스人들은 무역을 잘하
기도 했지만 金세공에 있어서도 천재였습니다.
사회 경주의 積石木槨墳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최근
「로마문화왕국-신라」라는 책을 써 크게 주목받은 古代유리 전문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4∼6세기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세계의 문화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더군
요.
李仁淑 신라의 金문화나 유리제품에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
마문화의 원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라문화의 뿌리는 그레코 로만 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고 봅니다.
權寧弼 신라왕의 칭호는 4세기 중엽의 내물왕 때부터 麻立干으로 바뀌었죠. 신라는 대체로 이 시기부터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사회 적석목곽분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죠.
權寧弼 적석목곽분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서 발원하여 흉노에게로 이어진 墓制(묘제)입니다.
▣ 김항용 -
▣ 김재원 - 훌륭한 자료감사합니다.
▣ 김재원 - 태서조카님! 신라천년 우리 선조님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곳 경주에 관한 자료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 김영환 -
▣ 김영윤 -
▣ 김은회 -
▣ 김주회 -
1500년 전 新羅김씨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모양의 독창적 金冠을 쓰고, 트라키아王이 선물한 黃金칼을 찼
으며, 하얀 西域産 天馬로 달리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숭배했다. 地中海 연안에서 제작한 예술적 유리병
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면서 페르시아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들. 東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세
계와 國交 수준으로 교류, 지구 반대편 문물과 사유체계를 받아들인 新羅人은 어떤 사상적 고향을 가진
種族인가.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노하우의 비밀을 추적한다
좌담 참석자
權寧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941년 서울 출신. 서울大 美學科 졸업. 독일 쾰른大 미술사학 철학박사. 고려大 교수, 중앙아시아 학회장
(現),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학과장(現).
金秉模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1940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포드大 문학박사. 한양大 박물관 관장, 한양大 문
과대 학장, 한국고고학회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委 위원장(現),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現).
申瀅植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1939년 충북 충주 출신. 서울大 사범대 역사학과 졸업. 문학박사. 이화여大 사학과 교수(現), 한국고대학
회장(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現).
李仁淑 前 경기도 박물관 관장
1949년 서울 출신. 서울大 고고인류학과 졸업. 고고학 미술사 박물관 박사. 문화재청 전문위원(現), 경기
도 박물관 관장, 서울大 고고미술사학과 강사(現).
사회·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일시: 2002년 1월31일 오후
장소: 月刊朝鮮 대표실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노골적으로 고구려 중심주의와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삼국
시대의 주역이고 백제와 신라는 조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전사」나 「조선통사」에는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南進(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평가하는 반면에 백제와
신라의 北進(북진)정책은 그 지배층의 탐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학계는 7세기의 신라가 唐과 연
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민족적 배신행위로 규정합니다.
李仁淑 신라의 삼국통일이 「민족적 배신행위」라는 북한 역사 이데올로그들(理論陣)의 주장은 객관적
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하나
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는 낡은 생각이 아직도 나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상의 삼국시대는 원
래 하나의 국가가 셋으로 분열된 것이 아닙니다. 청동기시대 이후 수백 개의 城邑國家(성읍국가)가 나타
났고, 그것들이 다시 전쟁과 동맹을 통해 광역의 영토국가인 신라, 고구려, 백제로 정리된 것입니다.
權寧弼 북한의 역사책에서 고구려는 선진문화의 창조자와 전파자로서 기록하는 반면 신라는 후진사회이
고 그 지배층은 삼국 간의 경제·문화적 교류를 방해하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
을 벌여 동족에 대한 더 많은 억압과 착취를 꾀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쪽에 갇혀 있던
「후진사회」라는 주장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모략입니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는 東아시아의 선
진사회인 중국 쪽의 문화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중국과 국교를 맺기 전까지의 신라는 북방 스텝 루트(초
원의 길)를 통해 서방세계의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최근, 흥미롭게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
던 것은 로마문화 수용시대에 축적된 에너지 때문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平壤을 민족사의 중심에 두려는 억지 攻勢
사회 북한의 역사 조작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북한은 평양 근교에서 檀君陵(단군릉)
과 檀君 뼈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단군 뼈를 전자상자성공명연대(ESR)에 의해 수십
번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267년 전의 뼈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대 이선복 교수는 그런 주장에 대해 기본적인 논리구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증거의 제시에 있어서
도 전혀 아무런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李仁淑 그 무덤 안에서 발견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檀君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은 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청동기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란 놀라운 기술을 가
지고 있었다는 억지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BC 12∼10세기에 개막됩니다. 소위 「단군
릉」은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5∼6세기 고구려의 어느 유력자 부부의 합장 무덤일 것입니다.
權寧弼 그것은 민족사의 중심을 평양으로 설정하려는 소위 주체사학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지나지 않습
니다. 학문적 관점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방적인 정치선전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단군조선
에 대한 북한의 그런 주장을 남한의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회 금년 들어 KBS TV가 檀君陵(단군릉)뿐만 아니라 東明聖王陵(동명성왕릉)에 관한 대형 특집 프로그
램을 잇달아 방영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非학문적인 북한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무시해야 마땅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영방송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릉뿐만 아니라 동명성왕릉에도 문제
가 있습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 東明聖王의 무덤은 平壤 천도 이후에도 옮겨지지 않고 舊
都인 集安(집안)에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방문한 남한의 지식인들 중 일부가 소
위 「단군릉」과 「동명성왕릉」을 참배하면서 五體(오체)를 땅바닥에 납작 붙이는 큰절까지 올리고 있
습니다. 절(寺) 모르고 시주하는 格이죠.
申瀅植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형성의 틀이 거의 완
성된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기반이 확고해진 것이죠.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장의 전국시대였
습니다. 피를 피로 씻는 수백년 간의 亂世(난세)를 治世(치세)로 바꾸었다는 것만으로 삼국통일은 역사
의 큰 발전입니다.
權寧弼 통일신라는 당시의 슈퍼파워 唐제국과 함께 선진문화권을 형성, 민족문화를 한 단계 높인 역할을
했습니다.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 맞은 황금기였습니다.
신라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 양식
사회 경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경주시내로 진입하면 옛 무덤들이 숱하게 눈에 띕니다. 이 무덤들이 호
화무비의 세계적 명품인 금관과 황금칼, 로만 글라스가 쏟아져 나온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
무덤)인데,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입니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신라왕이 麻立干(마립간)으로 불리던 시기(4∼6세기)의 무덤들입니다. 원래 북방
초원(스텝) 지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그가 생전에 살던 통나무 집을 돌과 흙으로 그대로 덮어버립니
다. 그래서 스텝지역의 적석목곽분을 파보면 난방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고 심지어 창문도 발견됩니다. 신
라 金씨들은 그런 옛 전통에 따라 지상에 시신을 넣을 집을 일부러 만들고 그 위에다 냇돌을 쌓은 다음 흙
으로 半球形(반구형) 봉분을 한 겁니다.
사회 金선생님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스키타이 추장 묘역인 이씩(Iccyk) 지역의 쿠르간(Kurgan=적
석목곽분)群을 둘러보셨죠? 경주의 대릉원과 비교하면 어떻습디까.
金秉模 積石木槨墳은 세월이 지나면 목곽 부분이 썩어 주저 앉기 때문에 적석 중앙 부분이 함몰되게 마련
입니다. 그 모양은 경주의 고분들과 같았지만 규모면에서 훨씬 크더군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스키타이족의 쿠르간들은 비 온 다음날의 개미굴처럼 수백 개가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權寧弼 스키타이族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黑海(흑해) 지역에서부터 천산산맥 사이에 위
치한 넓은 초원지대에서 농업과 유목을 경제수단으로 삼아 생활했습니다. 스키타이는 유별나게 황금을
사랑했습니다. 「스키타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가 붙인 것이고, 그 후손들인 유목민들은
자신들을 사카(Saka)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黑海를 통해 그리스인들과 교역하면서 그리스 제품인 황금물품을 많이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러
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그 당시 만들어진 물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1년 한국에서 열린 「스키타이 황금展」에서 전시된 것은 바로 이 유물들입니다. 이것들 중에 戰士
두 명이 角杯(각배) 하나로 술을 나눠 마시는 작품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이
씩 쿠르간(적석목곽분)에서 발굴된 黃金人間은 금을 사랑하던 스키타이人들의 풍속을 잘 보여 주었습니
다.
신라 金문화의 한 뿌리는 헬레니즘
李仁淑 스키타이人들은 황금을 사랑했지만 황금을 다루는 기술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용맹했던 스키
타이人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동물 무늬와 풍습이 조각된 황금제품을 그리스人들에게 주문하기도 했거든
요. 현대 비즈니스 용어로 말하면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입니다. 그리스人들은 무역을 잘하
기도 했지만 金세공에 있어서도 천재였습니다.
사회 경주의 積石木槨墳에 누워 있는 墓主들이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만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최근
「로마문화왕국-신라」라는 책을 써 크게 주목받은 古代유리 전문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4∼6세기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 들어온 로마세계의 문화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더군
요.
李仁淑 신라의 金문화나 유리제품에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입니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
마문화의 원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라문화의 뿌리는 그레코 로만 문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고 봅니다.
權寧弼 신라왕의 칭호는 4세기 중엽의 내물왕 때부터 麻立干으로 바뀌었죠. 신라는 대체로 이 시기부터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고 국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사회 적석목곽분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 일본에는 없는 무덤이죠.
權寧弼 적석목곽분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서 발원하여 흉노에게로 이어진 墓制(묘제)입니다.
▣ 김항용 -
▣ 김재원 - 훌륭한 자료감사합니다.
▣ 김재원 - 태서조카님! 신라천년 우리 선조님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곳 경주에 관한 자료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 김영환 -
▣ 김영윤 -
▣ 김은회 -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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