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로마 신라를 다시 본다(2)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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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06 21:08 조회2,527회 댓글0건본문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文武王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侯(투후)의 후예라는 기록이 적혀 있
습니다. 투후라면 匈奴(흉노)의 休屠王(휴도왕)의 아들인 金日(김일제: 기원전 134∼86)를 말합니다. 그
렇다면 신라김씨는 흉노 출신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흉노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中原에 압력을 가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입니다. 당시 초원에는 묵특(冒頓)이라는 흉노의 영걸이 나타나 초원의 패자인 單于(선
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楚漢(초한)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中原을 통일한 漢高祖 劉邦(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치기 위해 40만 대군
을 동원, 親征을 했다가 白登(백등)이라는 곳에서 흉노군 30만에게 오히려 포위당하고 말았죠. 묵특의 포
위작전은 매우 집요했어요. 아무리 포위망은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漢兵은 10인 가운데 두
세 명이 동상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흉노병은 추위에 익숙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
습니다. 결국 漢나라가 묵특에게 美人과 금을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겨우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한
나라는 흉노에게 사실상의 조공을 하게 됩니다. 교훈을 주려 했다가 되레 교훈을 받은 셈입니다.
申瀅植 漢과 흉노의 힘 관계는 漢武帝(한무제) 때에 가서야 역전됩니다. 漢의 장수 곽거병(곽거병)은 기
원전 122년 甘肅(감숙)지방에 있던 흉노를 쳤습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單于 이치는 그 책
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두 왕은 이치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漢나라
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
았지요. 휴도왕의 아들 日 (일제)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漢나라에 잡혀온 것은 바로 이때였
습니다. 그후 큰 戰功을 세운 日에 대해 漢武帝는 祭天金人(제천금인), 즉 「하늘에 제사 지내는 알타이
맨」이라고 해서 金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金秉模 日는 카자흐스탄語의 「삐디」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은 학식이 있는 사람, 선각자, 샤만 등
입니다. 漢武帝 이후 南흉노는 漢나라에 복속했지만, 北흉노는 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北흉노가 바로 게
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族입니다.
權寧弼 東로마제국을 전율케 했던 훈族의 지도자가 아틸라王(재위 434∼453)입니다. 아틸라王이 이끄는
훈族은 천산산맥 서쪽 일리(Illi) 지역에서 서진하여 단숨에 볼가江을 건너 東로마 경내로 침입했습니다.
보병을 주축으로 했던 東로마軍은 훈族 기마병의 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여러 도시가 폐허화했어요.
훈族은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를 지나 프랑스의 골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東로마제국은 속수무책이어서 아틸라王에게 평화를 애걸했습니다. 그 결과 불평등 강화조약이 체결되었
어요. 조약의 내용은 매년 950㎏의 금을 훈族에게 헌납한다는 것입니다. 東로마의 역사가 프리쿠스는 강
화회담중에 아틸라를 직접 목격하고 그의 용모를 「키가 작고 뚱뚱하며 머리통이 크지만 얕은 코에 수염
이 성긴 모습이다」고 기록해 놓았어요. 전형적인 몽골로이드(황색인)의 특징입니다.
申瀅植 로마세계의 금을 약탈했던 아틸라王의 大攻勢 직후에 신라에서는 세계적 명품인 금관을 정형화했
던 慈悲마립간(458∼479)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또한 慈悲마립간은 100여 척의 배에 타고 신라에 침범
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과 서쪽에서 거의 동시대에 알타이系 영웅의 캠
페인이 화려하게 펼쳐진 셈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김씨의 始祖는 金閼智(김알지)입
니다. 그렇다면 흉노 왕족 김일제와 김알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사회 김일제는 임종시의 漢武帝로부터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받았습니다. 김일제의 후손
들은 대대로 侯(투후)를 계승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王莽(왕망)의 찬탈 때 협조했던 모양입니다.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일어나 왕망의 新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를 부흥시킨 후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
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金秉模 그때 김일제의 후손들은 休屠國(휴도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王씨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이 사실
은 제가 휴도국 故地에 있는 비석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
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文武王의 陵碑(능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申瀅植 어찌 되었든 김알지는 탄생 후 昔脫解王(석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김알지의 후손인 仇道
(구도)는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공신이 되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仇道의 아
들 味鄒(미추)가 왕위에 올라 김씨계의 첫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김씨 왕들은 尼師今(이사금)이라
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17대 왕 訥祗(눌지)부터 麻立干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 후 智證(지증)을 끝
으로 마립간이란 칭호는 더 사용하지 않고 그 다음 대인 法興(법흥)부터 왕이란 칭호를 씁니다.
사회 이사금이나 麻立干의 뜻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李基文(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선생과 李基東(동국대·한국고대사) 교수와 함께 헝가리에 간 적
이 있는데, 그곳 학자가 바로 그런 질문을 합디다. 실은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한국 대학
교수가 세 사람이나 가서 답변을 못 한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때 했던 저의 답변을 여기서 다
시 한 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이사금은 원래 북방 초원지대의 어느 지역 이름인데, 나중에 그곳 출신 사람
들이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은 아마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인 것 같습니다. 신라
의 장군인 異斯夫(이사부), 일본의 전설시대 영웅인 이사오, 흉노와의 전쟁으로 이름을 남긴 漢의 장군
貳師(이사) 등은 모두 이씩 지방과 연결되는 알타이 계통 인물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東歐에 가면 「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신라의 마립간은 말릭+칸,
즉 말릭 출신의 大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칸은 「칭기즈칸」의 예에서 보듯 북방 초원지대에서 여러 왕들
까지 지배하는 지상 최고의 존재, 중국 같으면 황제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든요. 영웅에도 계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한 단계 높은 칭호로 보입니다. 이런 얘기를 제가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
던 그 헝가리 학자가 『헝가리 말로 말릭이 바로 영웅이다』라고 감탄을 하더군요.
金閼智=금(Gold)+금(Gold)
金秉模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始林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죠. 김알지
가 들어있던 궤짝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으로 첫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은 나무(木)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백화수)는 바로 生
命(생명)을 의미하는 神樹(신수)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불러온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三國遺事에는 昔脫解(석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들이 모두 따라오면서 춤추
고 뛰놀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시아 기마민족 간에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
입니다. 북방 유목민들 중에는 鳥葬(조장)을 치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
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알지의 姓(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지의 姓인 김은 금(Gold)을 뜻합니
다. 이름인 閼智(알지)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
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금(Gold+Gold)인 것입니다.
사회 그러니까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계 왕들의 무덤에 금제 유물이 많이 매장된 것이군요.
權寧弼 신라와 가야 사람 이름과 지명 중에 알타이 문화권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몽골 쪽에는 Altay, 중국 쪽에는 아르타이(阿勒泰), 러시아 쪽에는 Altai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알타이 산
맥의 최고봉인 우의봉에서 흘러내리는 강 이름도 아르치사江이에요. 이 강은 沙金(사금)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그 산의 이름도 金山(알타이山)입니다.
사회 신라의 지배층을 구성한 朴, 昔, 金씨들은 탄생과정이나 성씨의 유래, 角杯 사용과 같은 풍속을 살펴
보면 모두 기마민족 문화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김씨족들만 유별나게 금을 좋아했
던 것 같습니다. 금관은 김씨계 묘역인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거든요. 금관은 누가 썼다고 보십니까.
신라 금관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 주는 暗號
金秉模 금관은 聖骨(성골)만 썼는데, 그 중에서도 왕이 된 사람과 그 형제 자매들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금동관은 왕이 되지 못한 인물들이 사용한 것 같고, 은관은 금동관을 쓰지 못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의 금관은 先行형식이 있는 것입니까.
權寧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더욱 크게 하거나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닙니다. 鹿角樹枝形(녹각수지
형; 사슴뿔 모양의) 입식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지만, 直角樹枝形(직각수지형) 입식은 신라인의 독
창적 창안입니다.
사회 금관을 살펴보면 直角樹枝形 立飾(직각수지형 입식)이 3단인 것과 4단인 것들이 주로 발견되었는
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金秉模 종래까지 山字形 또는 出子形이라고 불렸던 立飾은 북방 초원지대의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니
만큼 樹枝形(수지형)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습니다. 금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한국 고대사의 비밀이
풀립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의 樹枝를 보면 1단, 2단, 3단, 4단형이 있습니다. 樹枝의 段(단)은 어느
왕계의 1대·2대·3대·4대 王인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몽골의 고고학자 노브고르도바 박사를 그의 생전에
만나 물어보았더니 『樹枝의 段은 원래 여자 샤먼의 제너레이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단언합디다.
사회 금관 스스로 갖고 있는 암호를 풀어보면 경주 大陵園(대릉원)의 적석목곽분 안에 누워 있는 墓主들
이 누구인지 대충 드러나겠군요.
金秉模 가장 화려한 4단짜리 금관이 나온 天馬塚(천마총=155호 고분)은 걸출했던 왕인 지증마립간의 무
덤입니다. 曲玉(곡옥)이 달려 있지 않은 4단짜리 금관이 나온 金鈴塚(금령총)은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소
지마립간의 무덤이지요. 胎兒(태아)의 모습인 曲玉은 多産을 의미합니다.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3단짜
리 금관이 나온 瑞鳳塚(서봉총) 북분은 鳥生夫人(조생부인)의 무덤입니다. 3단짜리지만 가장 장중한 금
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김씨 왕계의 王中王이라 할 만한 자비마립간의 무덤, 3단짜리 금관이 출토된 황남
대총(98호 고분) 北墳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마립간의 여동생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李仁淑 鳥生夫人이라면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금관에만 유일하게 새가 장식되었다
는 것이 흥미롭군요. 그런데 서봉총 금관을 조생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지증왕의 어머니인 鳥生은 눌지마립간의 딸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입니다. 그
러니까 聖骨 중의 聖骨입니다. 그녀의 탄생 과정에도 새와 관련된 얘기가 있었지만, 失傳(실전)된 것 같
습니다. 신라 瓢形墳(표형분; 표주박형의 무덤)의 경우 북분은 여자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자의 무덤입니
다. 서봉총 북분의 주인공도 여자일 것입니다. 이 북분에서 서봉총 금관의 임자가 누구인가를 풀 수 있는
유물 하나가 나왔습니다.
銀으로 만든 盒(합)인데, 거기에 「辛卯年」이란 銘文이 적혀 있어요. 그 辛卯年은 지증마립간 4년(511)
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王中王으로 일컬어지는 지증왕마립간은 鳥生부인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銀盒(은합)은 지증마립간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호화로운 유물을 내장하고 「신묘
년」이라는 명문까지 써 넣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금 귀고리
李仁淑 신라금관에는 수목과 녹각, 그리고 새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수목과 새 숭배사상은 神의 메
신저로서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랜 전통입니다. 사슴 숭배사상 또한 사슴의 뿔이 나
뭇가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결국은 수목숭배에서 나온 모티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금관에
는 생명과 多産의 상징인 曲玉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금관들의 장식 모티브와 제작 아
이디어는 그것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墓制인 적석목곽분과 더불어 시베리아 대륙 유목문화의 소산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權寧弼 금관은 결국 신라인의 창안품이지만, 그 조형의 바탕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슴뿔과 나무 등의 소재
를 디자인화한 것인데,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돈江의 노보체르카
스트 출토)과 강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금관에 부착된 둥근 잎새형의 瓔珞(영락; 구슬 꿴 장식)도 동아
시아에는 유례가 없는 외래 요소입니다. 금관과 장신구에 부착된 曲玉도 알타이의 파지리크 지역에서 그
사용례가 발견되며 금제 허리띠 또한 오르도스의 흉노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회 신라의 금문화는 양에 있어서 엄청나게 풍부하며 주로 장신구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同시대
東아시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상입니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제품은 금관, 금귀고리, 금
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금요패와 패식, 금제 신발 등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장식으로 멋을 부린
셈입니다.
李仁淑 고신라 무덤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금제 귀고리가 무수하게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太環式
(태환식) 귀고리는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중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예가 없습
니다. 신라의 태환식 귀고리와 똑같은 태환식 귀고리의 실물이 확인된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입니다. 이집
트의 그레코 로만시대, 즉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는 프톨레마이오스王朝의 귀고리 중에서 신라의 그것
과 거의 동일한 형태와 제작기법의 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렇게 신라 금제 귀고
리에 표현된 기술을 살펴보면 그 맥이 그레코 로만 시대의 금공예품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權寧弼 신라는 당시 이집트 수학의 8進法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 김용운(수학) 교수에 따르면 아
직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이팔(2×8)청춘」 같은 것이 그 흔적입니다.
李仁淑 순금의 가공에 필요한 모든 기술이 총동원되어 있는 듯한 다양한 기법과 표현양식은 모두 찬란한
그리스人들의 金工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똑같은 장식 모티브(의장)가 유라시아 대
륙의 동과 서에서 출현할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이는 확실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주회 -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사회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文武王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侯(투후)의 후예라는 기록이 적혀 있
습니다. 투후라면 匈奴(흉노)의 休屠王(휴도왕)의 아들인 金日(김일제: 기원전 134∼86)를 말합니다. 그
렇다면 신라김씨는 흉노 출신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흉노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中原에 압력을 가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입니다. 당시 초원에는 묵특(冒頓)이라는 흉노의 영걸이 나타나 초원의 패자인 單于(선
우)가 되어 있었습니다.
楚漢(초한)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中原을 통일한 漢高祖 劉邦(한고조 유방)이 흉노를 치기 위해 40만 대군
을 동원, 親征을 했다가 白登(백등)이라는 곳에서 흉노군 30만에게 오히려 포위당하고 말았죠. 묵특의 포
위작전은 매우 집요했어요. 아무리 포위망은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漢兵은 10인 가운데 두
세 명이 동상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흉노병은 추위에 익숙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
습니다. 결국 漢나라가 묵특에게 美人과 금을 바치겠다고 약조하고 겨우 포위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한
나라는 흉노에게 사실상의 조공을 하게 됩니다. 교훈을 주려 했다가 되레 교훈을 받은 셈입니다.
申瀅植 漢과 흉노의 힘 관계는 漢武帝(한무제) 때에 가서야 역전됩니다. 漢의 장수 곽거병(곽거병)은 기
원전 122년 甘肅(감숙)지방에 있던 흉노를 쳤습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單于 이치는 그 책
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두 왕은 이치 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漢나라
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
았지요. 휴도왕의 아들 日 (일제)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漢나라에 잡혀온 것은 바로 이때였
습니다. 그후 큰 戰功을 세운 日에 대해 漢武帝는 祭天金人(제천금인), 즉 「하늘에 제사 지내는 알타이
맨」이라고 해서 金씨 성을 하사했습니다.
金秉模 日는 카자흐스탄語의 「삐디」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그 뜻은 학식이 있는 사람, 선각자, 샤만 등
입니다. 漢武帝 이후 南흉노는 漢나라에 복속했지만, 北흉노는 서쪽으로 옮겨갔습니다. 北흉노가 바로 게
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촉발한 훈族입니다.
權寧弼 東로마제국을 전율케 했던 훈族의 지도자가 아틸라王(재위 434∼453)입니다. 아틸라王이 이끄는
훈族은 천산산맥 서쪽 일리(Illi) 지역에서 서진하여 단숨에 볼가江을 건너 東로마 경내로 침입했습니다.
보병을 주축으로 했던 東로마軍은 훈族 기마병의 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여러 도시가 폐허화했어요.
훈族은 오늘날의 불가리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를 지나 프랑스의 골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東로마제국은 속수무책이어서 아틸라王에게 평화를 애걸했습니다. 그 결과 불평등 강화조약이 체결되었
어요. 조약의 내용은 매년 950㎏의 금을 훈族에게 헌납한다는 것입니다. 東로마의 역사가 프리쿠스는 강
화회담중에 아틸라를 직접 목격하고 그의 용모를 「키가 작고 뚱뚱하며 머리통이 크지만 얕은 코에 수염
이 성긴 모습이다」고 기록해 놓았어요. 전형적인 몽골로이드(황색인)의 특징입니다.
申瀅植 로마세계의 금을 약탈했던 아틸라王의 大攻勢 직후에 신라에서는 세계적 명품인 금관을 정형화했
던 慈悲마립간(458∼479)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또한 慈悲마립간은 100여 척의 배에 타고 신라에 침범
한 왜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과 서쪽에서 거의 동시대에 알타이系 영웅의 캠
페인이 화려하게 펼쳐진 셈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김씨의 始祖는 金閼智(김알지)입
니다. 그렇다면 흉노 왕족 김일제와 김알지는 어떻게 연결됩니까.
사회 김일제는 임종시의 漢武帝로부터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받았습니다. 김일제의 후손
들은 대대로 侯(투후)를 계승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王莽(왕망)의 찬탈 때 협조했던 모양입니다.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일어나 왕망의 新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를 부흥시킨 후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피
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金秉模 그때 김일제의 후손들은 休屠國(휴도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王씨로 바꾸고 살았습니다. 이 사실
은 제가 휴도국 故地에 있는 비석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
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文武王의 陵碑(능비)에 새겨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申瀅植 어찌 되었든 김알지는 탄생 후 昔脫解王(석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김알지의 후손인 仇道
(구도)는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공신이 되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仇道의 아
들 味鄒(미추)가 왕위에 올라 김씨계의 첫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김씨 왕들은 尼師今(이사금)이라
는 칭호를 사용하다가 17대 왕 訥祗(눌지)부터 麻立干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 후 智證(지증)을 끝
으로 마립간이란 칭호는 더 사용하지 않고 그 다음 대인 法興(법흥)부터 왕이란 칭호를 씁니다.
사회 이사금이나 麻立干의 뜻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李基文(서울대 명예교수·언어학) 선생과 李基東(동국대·한국고대사) 교수와 함께 헝가리에 간 적
이 있는데, 그곳 학자가 바로 그런 질문을 합디다. 실은 지금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한국 대학
교수가 세 사람이나 가서 답변을 못 한다고 해서야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때 했던 저의 답변을 여기서 다
시 한 번 되풀이하겠습니다. 이사금은 원래 북방 초원지대의 어느 지역 이름인데, 나중에 그곳 출신 사람
들이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은 아마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인 것 같습니다. 신라
의 장군인 異斯夫(이사부), 일본의 전설시대 영웅인 이사오, 흉노와의 전쟁으로 이름을 남긴 漢의 장군
貳師(이사) 등은 모두 이씩 지방과 연결되는 알타이 계통 인물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東歐에 가면 「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신라의 마립간은 말릭+칸,
즉 말릭 출신의 大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칸은 「칭기즈칸」의 예에서 보듯 북방 초원지대에서 여러 왕들
까지 지배하는 지상 최고의 존재, 중국 같으면 황제에 해당하는 인물이거든요. 영웅에도 계급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한 단계 높은 칭호로 보입니다. 이런 얘기를 제가 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
던 그 헝가리 학자가 『헝가리 말로 말릭이 바로 영웅이다』라고 감탄을 하더군요.
金閼智=금(Gold)+금(Gold)
金秉模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始林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죠. 김알지
가 들어있던 궤짝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으로 첫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은 나무(木)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백화수)는 바로 生
命(생명)을 의미하는 神樹(신수)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불러온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三國遺事에는 昔脫解(석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들이 모두 따라오면서 춤추
고 뛰놀았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시아 기마민족 간에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媒介者(매개자)
입니다. 북방 유목민들 중에는 鳥葬(조장)을 치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
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김알지의 姓(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지의 姓인 김은 금(Gold)을 뜻합니
다. 이름인 閼智(알지)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
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금(Gold+Gold)인 것입니다.
사회 그러니까 김알지의 후손인 김씨계 왕들의 무덤에 금제 유물이 많이 매장된 것이군요.
權寧弼 신라와 가야 사람 이름과 지명 중에 알타이 문화권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것이 여러 개 있습니다.
몽골 쪽에는 Altay, 중국 쪽에는 아르타이(阿勒泰), 러시아 쪽에는 Altai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알타이 산
맥의 최고봉인 우의봉에서 흘러내리는 강 이름도 아르치사江이에요. 이 강은 沙金(사금)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지요. 그래서 그 산의 이름도 金山(알타이山)입니다.
사회 신라의 지배층을 구성한 朴, 昔, 金씨들은 탄생과정이나 성씨의 유래, 角杯 사용과 같은 풍속을 살펴
보면 모두 기마민족 문화의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김씨족들만 유별나게 금을 좋아했
던 것 같습니다. 금관은 김씨계 묘역인 적석목곽분에서만 나왔거든요. 금관은 누가 썼다고 보십니까.
신라 금관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 주는 暗號
金秉模 금관은 聖骨(성골)만 썼는데, 그 중에서도 왕이 된 사람과 그 형제 자매들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금동관은 왕이 되지 못한 인물들이 사용한 것 같고, 은관은 금동관을 쓰지 못한 계층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의 금관은 先行형식이 있는 것입니까.
權寧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더욱 크게 하거나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닙니다. 鹿角樹枝形(녹각수지
형; 사슴뿔 모양의) 입식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지만, 直角樹枝形(직각수지형) 입식은 신라인의 독
창적 창안입니다.
사회 금관을 살펴보면 直角樹枝形 立飾(직각수지형 입식)이 3단인 것과 4단인 것들이 주로 발견되었는
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金秉模 종래까지 山字形 또는 出子形이라고 불렸던 立飾은 북방 초원지대의 자작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니
만큼 樹枝形(수지형)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 같습니다. 금관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한국 고대사의 비밀이
풀립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의 樹枝를 보면 1단, 2단, 3단, 4단형이 있습니다. 樹枝의 段(단)은 어느
왕계의 1대·2대·3대·4대 王인지를 표시한 것입니다. 몽골의 고고학자 노브고르도바 박사를 그의 생전에
만나 물어보았더니 『樹枝의 段은 원래 여자 샤먼의 제너레이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단언합디다.
사회 금관 스스로 갖고 있는 암호를 풀어보면 경주 大陵園(대릉원)의 적석목곽분 안에 누워 있는 墓主들
이 누구인지 대충 드러나겠군요.
金秉模 가장 화려한 4단짜리 금관이 나온 天馬塚(천마총=155호 고분)은 걸출했던 왕인 지증마립간의 무
덤입니다. 曲玉(곡옥)이 달려 있지 않은 4단짜리 금관이 나온 金鈴塚(금령총)은 후계자를 두지 못했던 소
지마립간의 무덤이지요. 胎兒(태아)의 모습인 曲玉은 多産을 의미합니다.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3단짜
리 금관이 나온 瑞鳳塚(서봉총) 북분은 鳥生夫人(조생부인)의 무덤입니다. 3단짜리지만 가장 장중한 금
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김씨 왕계의 王中王이라 할 만한 자비마립간의 무덤, 3단짜리 금관이 출토된 황남
대총(98호 고분) 北墳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비마립간의 여동생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李仁淑 鳥生夫人이라면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인데, 그녀의 금관에만 유일하게 새가 장식되었다
는 것이 흥미롭군요. 그런데 서봉총 금관을 조생부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金秉模 지증왕의 어머니인 鳥生은 눌지마립간의 딸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입니다. 그
러니까 聖骨 중의 聖骨입니다. 그녀의 탄생 과정에도 새와 관련된 얘기가 있었지만, 失傳(실전)된 것 같
습니다. 신라 瓢形墳(표형분; 표주박형의 무덤)의 경우 북분은 여자의 무덤이고 남분은 남자의 무덤입니
다. 서봉총 북분의 주인공도 여자일 것입니다. 이 북분에서 서봉총 금관의 임자가 누구인가를 풀 수 있는
유물 하나가 나왔습니다.
銀으로 만든 盒(합)인데, 거기에 「辛卯年」이란 銘文이 적혀 있어요. 그 辛卯年은 지증마립간 4년(511)
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王中王으로 일컬어지는 지증왕마립간은 鳥生부인의 아들입니다. 따라서
문제의 銀盒(은합)은 지증마립간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호화로운 유물을 내장하고 「신묘
년」이라는 명문까지 써 넣어진 것으로 해석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금 귀고리
李仁淑 신라금관에는 수목과 녹각, 그리고 새 등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수목과 새 숭배사상은 神의 메
신저로서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시베리아 샤먼의 오랜 전통입니다. 사슴 숭배사상 또한 사슴의 뿔이 나
뭇가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결국은 수목숭배에서 나온 모티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금관에
는 생명과 多産의 상징인 曲玉이 무수히 장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금관들의 장식 모티브와 제작 아
이디어는 그것이 출토된 신라 고분의 墓制인 적석목곽분과 더불어 시베리아 대륙 유목문화의 소산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權寧弼 금관은 결국 신라인의 창안품이지만, 그 조형의 바탕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슴뿔과 나무 등의 소재
를 디자인화한 것인데,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돈江의 노보체르카
스트 출토)과 강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금관에 부착된 둥근 잎새형의 瓔珞(영락; 구슬 꿴 장식)도 동아
시아에는 유례가 없는 외래 요소입니다. 금관과 장신구에 부착된 曲玉도 알타이의 파지리크 지역에서 그
사용례가 발견되며 금제 허리띠 또한 오르도스의 흉노 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사회 신라의 금문화는 양에 있어서 엄청나게 풍부하며 주로 장신구류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同시대
東아시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상입니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금제품은 금관, 금귀고리, 금
목걸이, 금팔찌, 금반지, 금요패와 패식, 금제 신발 등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금장식으로 멋을 부린
셈입니다.
李仁淑 고신라 무덤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금제 귀고리가 무수하게 출토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太環式
(태환식) 귀고리는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중국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예가 없습
니다. 신라의 태환식 귀고리와 똑같은 태환식 귀고리의 실물이 확인된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입니다. 이집
트의 그레코 로만시대, 즉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는 프톨레마이오스王朝의 귀고리 중에서 신라의 그것
과 거의 동일한 형태와 제작기법의 유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렇게 신라 금제 귀고
리에 표현된 기술을 살펴보면 그 맥이 그레코 로만 시대의 금공예품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權寧弼 신라는 당시 이집트 수학의 8進法을 수용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 김용운(수학) 교수에 따르면 아
직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사용되는 「이팔(2×8)청춘」 같은 것이 그 흔적입니다.
李仁淑 순금의 가공에 필요한 모든 기술이 총동원되어 있는 듯한 다양한 기법과 표현양식은 모두 찬란한
그리스人들의 金工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똑같은 장식 모티브(의장)가 유라시아 대
륙의 동과 서에서 출현할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이는 확실히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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