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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다시 본다.(4) (폭탄주) 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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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06 21:28 조회2,0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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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權寧弼 角杯의 특징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첫째 지도층 인물과 연관된다는 것입니



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대관식 때 왕의 머리에 붓는 기름을 각배에 담았습니다. 신라, 가야의 왕족 무덤



에서 각배가 발견되고 있다는 걸 봐도 각배와 지도자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각배와 물과의 관계



입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각배에 샘물이 나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 페가수스를 조각했으며 신라에



서는 昔脫解가 東岳에서 샘물을 찾을 때 각배를 사용했습니다.



金秉模 각배는 유목민족이 「폭탄주」를 만드는 데도 사용된 것 같습니다. 몽골에 가니까 馬乳酒(마유



주)를 담은 양푼에다 알코올 도수 100%의 독한 蒸溜酒(증류주)인 「사밍」을 채운 작은 은잔을 던져 넣



어 그것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속이 남아 있더군요. 옛날에는 은잔이 아니라 각배에 「사밍」을 담아 馬乳



酒가 든 가죽 포대에 집어넣었고 합디다. 어떻든 우리의 「폭탄주」 제조 방식과 매우 비슷합니다.



權寧弼 각배는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북중국,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각



배를 사용하는 풍습은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족, 흉노족으로 연결되는 스텝지역의 기마민



족 간의 접촉과 민족이동 과정에서 전파된 것 같습니다.



사회 신라·가야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했는데, 고구려·백제 지역에선 角杯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金秉模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백제 왕족과 신라·가야 왕족의 고향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고구려와 백제



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살던 夫餘系(부여계)이고, 신라와 가야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서쪽



에서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辰韓- 新羅의 주민 형성





사회 신라는 辰韓(진한) 12개국 중 하나인 斯盧(사로) 6촌이 합쳐 생긴 나라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이 누



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辰韓人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면 됩니다.



權寧弼 三國志 東夷傳에는 辰韓 사람들이 중국 秦나라 땅에서 이주해 왔으며 馬韓 사람과 말이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秦은 戰國時代 7雄의 하나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에 中原을



통일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秦의 始皇帝(시황제)는 북방 흉노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



을 쌓았고 咸陽(함양)에다 阿房宮(아방궁)을 지었습니다. 三國志에 기록된 「괴로운 부역」이란 바로 토



목, 건축에 동원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라의 주민 형성 과정은 4중, 5중으로 복잡한 것 같습니



다.



申瀅植 우리 史書에도 신라의 인구 구성에 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赫居



世 條에 보면 「이곳(서라벌)에는 오래 전부터 朝鮮의 유민들이 산 계곡에 나누어 살아서 여섯 마을을 형



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또 유리왕 14년(서기 37년) 條에는 「고구려 無恤王(무휼왕=大武神



王)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그 나라(낙랑) 사람들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金秉模 여러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 과정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



에 걸쳐 혼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先史時代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중에 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



주해 온 古朝鮮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당한 樂浪(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입니다.



사회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은 東夫餘에서 망명한 인물이고, 百濟의 시조 溫祚(온조)는 朱蒙의 아들임



을 자처했던 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은 한 집안인 夫餘系(부여계)입니다. 반면에 신라의 왕족인 朴,



昔, 金의 3姓으로 그 出自는 다양합니다.



金秉模 신라 5대 왕인 婆娑(파사) 이사금은 페르시아와 無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를 한자로



적으면 波斯(파사)입니다. 이 정도면 親緣性(친연성)이 매우 깊은 것입니다. 또 8대 왕인 阿達羅(아달라)



이사금은 흉노계로 보입니다. 東로마제국을 침략하여 엄청난 양의 금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훈族(흉노족)



의 정복왕 아틸라와 이름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틸라는 阿達羅의 후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런 것을 무시하면 古代史 못 합니다.





古신라는 中國문화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權寧弼 신라의 적석목곽분으로부터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은 西方세계로부터 수입된 것도 있는가 하면 西



方문화 속에서 생겨난 디자인 및 기술기법을 신라에 도입해서 신라에서 만든 것이 있습니다. 중국문화를



반영시킨 유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분의 축조는 그 민족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민족의 전통문



화인 만큼 그 형태는 민족 고유의 전통을 반영시킵니다. 적석목곽분이라는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민족, 특



히 스텝 루트 지방으로부터 南러시아에 정착한 스키타이人과 그 후예들의 墓制로서 신라에 도입된 것입



니다. 이러한 물질문화는 實在의 증거물로서 오늘날 그 누구의 눈에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지만, 정신문



화의 면에서는 시각적으로 그것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통상 기록된 사료에 의해 그 개략을 아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라 독자의 기록사료가 없습니다. 三國史記만 해도 신라가 망한 지 200여 년이나 지난 12세



기에 쓰여진 것입니다.



金秉模 三國史記에선 왜 이런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저자가 중국 史書를 그대로 베낀 것 아닙니



까.



申瀅植 신라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7세기 이후여서 신라에 관한 중국의 사료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중



국 사료는 너무 중국 중심주의, 즉 中華思想(중화사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漢族은 中國 것이 아니면 전



부 오랑캐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민족입니다.



金秉模 저처럼 고고학을 하는 사람의 얘기는 文獻史學(문헌사학)을 하시는 申선배님에겐 좀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申瀅植 저는 우리 고고학계의 성과를 우리 역사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新羅史에 관



한 책을 몇 권 썼지만, 오늘 좌담회에서 말씀들을 들어보니 다시 고쳐 써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문헌사학



계가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權寧弼 麻立干 시대의 신라는 중국과의 국교를 맺지 않았습니다. 초원의 길을 통해 서쪽 세계와 교류하



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굳이 中國에 기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申瀅植 신라가 6세기 초까지는 중앙아시아, 중동,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문명을 수용했던 것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루트를 통해 로마의 문명이 신라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李仁淑 4세기 이후 북부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던 鮮卑族(선비족)의 왕조 北魏(북위)는 수도를 大同에 두



고서 로마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에 발굴된 일련의 비잔틴(東로마제국) 銀



器 및 人物浮彫(인물부조) 무늬의 컵 등은 그런 관계를 나타내는 훌륭한 유물입니다. 또한 北魏의 高官



무덤들에서도 전형적인 로만 글라스類가 나와 신라의 출토품과 공통적인 요소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



러나 북위가 華北(화북)을 통일하고 수도를 洛陽(낙양)으로 옮긴 후에는 로마系 유물의 수용을 끊었던 듯



합니다.





東海岸 루트와 연결된 草原의 길





權寧弼 초원의 길로 東傳(동전)해 온 로마문화는 오늘날의 바이칼湖畔의 이르쿠츠크로부터 울란우데를



돌아서 몽골사막을 거쳐 大同에 이르고 거기서 동향하여 龍城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시베리



아 구간은 대체로 오늘날 시베리아 철도가 깔려 있는 길입니다.



申瀅植 신라로 들어오려면 고구려를 거쳐야 했을 터인데, 어려움은 없었을까요.





李仁淑 麻立干 시대의 신라는 고구려와 대체로 우호관계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三國史記를 보아도 양국



간에 전쟁 혹은 분쟁의 기록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廣開土王(광개토왕)의 陵碑文(능비문)을 보면 신라



를 침공한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에게 격퇴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신라의 17



대 왕 奈勿(내물) 이사금은 이찬 大西知의 아들 實聖(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내는 등 우호관계를 맺



습니다. 그리고 인질로부터 돌아온 實聖이 奈勿 이사금의 뒤를 이어 18대 신라왕이 되면 역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奈勿 이사금의 셋째 아들 卜好(복호)를 인질로 고구려에 보냅니다. 이렇게 해



서 신라는 고구려의 영토를 경유하여 西方문화를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申瀅植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자국 영토를 통해 뛰어난 로마문화가 통과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용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았을까요.





權寧弼 신라는 동해안 루트로 서방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초원의 길이 몽골 지역과 滿洲의 吉



林을 거쳐 동해안 루트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해안 루트는 아무래도 고구려 중앙정부의 힘이



강렬하게 미치지는 않았겠지요.



사회 동해안 루트가 오늘날의 휴전선처럼 틀어막혀 있었겠습니까. 또 그 시절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



쁘지도 않았지요.



李仁淑 저도 초원의 길이 동해안 루트와 연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해안 루트는 후일 渤海(발해)의 新



羅道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또 저는 초원의 길이나 그 남방의 오아시스 루트 못지 않게 海路(해로)



를 통해 西方의 문화가 신라로 들어왔다고 봅니다. 예컨대 味鄒王陵(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잠자리 눈 구슬」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 그 작은 「잠자리 눈 구슬」에는 네 인물이 새겨져 있는데, 양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 콧날이 날카



롭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인도네시아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서양 사람 얼굴인 것 같습니다.



李仁淑 얼굴을 보면 서역 사람인 것은 확실합니다. 「잠자리 눈 구슬」의 본래 생산지는 중앙아시아, 제



조 센터는 인도였습니다. 그러나 5세기를 전후해서 인도네시아에서도 「잠자리 눈 구슬」을 많이 생산했



습니다.



사회 6세기 이후 신라와 서방의 교류가 소원해지다가 드디어 단절되고 맙니다. 왜 그랬습니까.



權寧弼 그 이유는 5세기에 훈族의 침략과 게르만族의 대이동으로 유럽과 小아시아에 걸쳐 있던 로마의



식민지가 황폐화했기 때문입니다. 463년에 東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476년



에는 西로마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이어 반달人과 불가르人들이 東로마 영내로 침공합니다. 이처럼 南러



시아로부터 흑해·지중해 지대, 발칸반도, 이탈리아, 중부 유럽이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신라와 관계



가 깊었던 흑해 西岸의 다키아 및 트라키아는 침입해 온 이민족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궤멸적



타격을 받은 로마세계는 대외관계를 상실해 갑니다. 신라로선 문화교류의 상대방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



래서 신라는 法興王(법흥왕) 이후 중국과의 접촉을 적극화하여 중국문화를 흡수합니다.





넓은 세계를 알았던 新羅人의 국제감각이 統一의 에너지





사회 신라의 삼국통일이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떤 상상력을 줄 수 있습니까.





權寧弼 유목민족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정보를 잘 이용하며 성격적으로는 간단명료하고 명랑한 것인데,



북방 초원지대의 기마민족에 뿌리를 둔 신라인들이 바로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계화·정보화 시



대인 21세기에 우리 민족이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제2의 민족전성기를 실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



산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정보와 지식의 축적에 약한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가 현대에 이르러 정보와 지



식의 축적에 강한 민족에게 패배한 사실에서는 반드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金秉模 東아시아 세계만 알고 있었던 고구려인과 백제인에 비해 신라는 지구 반대편의 정보까지 가지고



있었던 만큼 유연하고 균형감각도 탁월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시 東아시아의 최강 唐과의 동맹에



성공한 비결이었다고 봅니다. 삼국 모두가 경쟁적으로 對中외교를 벌였는데, 뒤늦게 뛰어든 신라가 同盟



을 성사시킨 배경에는 신라인의 국제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李仁淑 신라는 내부 단결도 삼국통일의 중요한 動因(동인)이었습니다. 그것은 朴, 昔, 金의 세 姓씨가 차



례로 王이 되었지만, 피바다를 이룬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昔씨 왕은 金씨를 보호했고, 金씨 왕은 朴씨



를 왕비로 삼은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삼국통일 제1의 元勳(원훈)인 金庾信(김유신)도 가야김씨가 아



닙니까. 신라가 엄격한 골품사회이긴 했지만,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습니다. 착취관



계라기보다는 공존관계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귀족 자제인 화랑과 평민 자제인 낭도 간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삼국 가운데 신라의 유사시 동원력이 가장 우수했던 것 같습니다.



申瀅植 신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었던 唐제국과 相生관계를 이뤄 민족문화를 발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東아시아 세계를 세계 제1의 문명권으로 끌어올린 공헌을 했습니다.





▣ 김재원 - 훌륭한자료 정말 감사 합니다.

▣ 김영환 -

▣ 김재익 -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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