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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로마 신라를 다시본다(5) 신라金씨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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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5-06 21:37 조회1,6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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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주요내용

新羅에 대한 無知와 모략

신라金씨는 匈奴의 후예

鷄林路 고분서 출토된 寶劍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문화

신라金씨의 시조 金閼智의 탄생설화





탈해왕 9년 봄 3월, 왕이 금성 서쪽 숲(始林)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닭이 우는 곳으로



瓠公(호공)을 보냈다. 숲 사이에서는 황금빛의 작은 궤짝(櫃)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



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왕



이 두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작은 사내 아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은 크게 기



뻐하며 조신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보낸 아들이니라』 하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



점 자라며 더욱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라 했고, 금빛 궤짝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金씨라 했



다. 또 始林(시림)을 鷄林(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정했다.<三國史記 脫解 이사금 9년(AD 65) 條>



문무왕릉비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陵碑(능비)로, 그 파편 하나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



어 있다. 이 비는 일찍이 무너져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正祖 20년(1796)에 이르러 두 개의 비



편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문인 洪良浩(홍양호)의 「耳溪集」(이계집)에 의하면 경주지방 사람이 이 비를



발견했다. 이 비편은 그후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본 넉 장이 淸나라의 학자 劉喜海에게 입수되어



「海東金石苑」(해동금석원)에 실렸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다시 발견되었다. 1796년에 발견된 비편 중 碑身(비신) 하부



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의 석질은 火成岩이며, 남아 있는 비편의 최고 높이는 52㎝, 너비 64㎝, 두께 24



㎝이다. 전문가들은 이 비의 건립연대를 비문 중의 「國學少卿」이라는 관직명과 삼국사기의 國學 설치



기사 등과 관련, 신문왕 2년(682)으로 보고 있다.



비문의 전체는 비 자체의 파손된 부분이 많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



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장례 사실, 碑銘(비명) 등이 적혀 있다. 비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신라김씨의 出自에 관한 것으



로 「侯祭天之胤傳七葉…星漢王」(투후제천지륜전칠엽…성한왕)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투후의 후손이 7대를 전승하여…하였는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시고」라고 풀이된다. 투



후 金日는 흉노 休屠王의 태자였으며 성한왕은 신라김씨의 시조 김알지 또는 신라김씨 중 최초로 왕위에



오른 味鄒王(미추왕)이라는 등의 견해로 엇갈려 있다.



天馬塚과 가장 화려한 금관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고분 중 유일하게 공개되고 있는 것이 제155호 고분인 천마총이다.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말다래(障泥)가 출토되었는데, 말다래에 날개가 달린 말이 구름을 뚫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천마총으로 명명되었다. 말의 갈기와 꼬리가 뒤로 휘날리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이



다. 말다래란 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말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馬具를 말한다. 天馬圖



가 그려진 말다래는 자작나무(白樺) 껍질을 여러 겹으로 겹쳐 누벼 만든 것이다.



천마총은 바닥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의 원형 봉토분으로 내부 구조는 積石木槨墳이다.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인 천마총의 축조양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해 다시 냇돌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 다



시 목곽을 설치했다. 목곽 내부에 부장품을 넣은 궤와 시체를 넣은 棺을 수직으로 안치했다. 목곽 위를 다



시 냇돌로 쌓아 덮었으며, 냇돌층은 다시 진흙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흙을 쌓아 半球形



(반구형)으로 封墳(봉분)했다.



천마총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적석목곽분이지만 신라 고분 중에서 다양한 종류의 호화로운 유물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천마총 출토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다른 금관



에 비해 금판도 두껍다. 높이 32.7㎝, 직경 20㎝. 정면에 4단 直角 樹枝形 立飾이 세 개 있고, 뒷면에는 鹿



角形 立飾이 두 개 있다. 귀 앞쪽으로 두 개의 垂飾이 늘어져 있고 曲玉과 樹葉이 많이 달려 있다. 立飾의



꼭대기는 寶珠形이다.



천마총에서는 금관, 금모자, 새날개 모양의 冠飾(관식), 金허리띠, 金銅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



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로만 글라스도 열한 점이나 나왔다.



金冠塚 금관



금관총 금관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이다. 관테(帶輪)의 직경이 19㎝로 성인용이며 3단 直角 수지



형 立飾(입식)이 세 개, 鹿角形(녹각형) 입식이 두 개 있다. 귀 앞쪽으로는 垂飾(수식) 두 개를 늘어뜨렸



고, 曲玉 57개와 樹葉 130개가 매달려 있다. 입식 꼭대기는 寶珠形(보주형) 장식으로 마감되었다.



1921년 집터를 파던 중 봉분이 파괴되어 유물층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발견된 것이다. 금관총에서는 금제



관모 세 개 분, 금동제 관의 立飾 두 개 분, 銀製관식 한 개 분, 그리고 금제 귀고리, 금제 팔찌와 반지, 금



제 허리띠와 요패 등 피장자가 착용하던 여러 가지 금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瑞鳳塚 금관



瑞鳳塚 금관의 특징은 가지 위에 새(鳥) 세 마리가 앉아 있는 점이다. 이 새는 몸집이 무거워 보이고 머리



에는 冠 모양의 깃털이 나 있다. 높이 30.7㎝, 직경 18.4㎝이다. 直角 樹枝形 3단 立飾 세 개가 있으며, 뒷



면에도 鹿角形 입식이 세 개 있다.



瑞鳳塚은 적석목곽묘로 표주박 모양의 雙墳(쌍분)인데, 그 중 北墳(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 1926년 발



굴 당시 스웨덴(瑞典)의 구스타프 왕자가 참관한 것과 세 마리의 새(鳳)가 장식된 금관이 나왔다는 점을



참작하여 瑞鳳塚이라고 명명되었다. 여기서 함께 출토된 銀盒(은합)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延壽元年(연



수원년)이라는 연호와 辛卯年(신묘년)의 干支(간지)가 든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다.



角杯의 유래와 三國遺事의 관련 기록



角杯는 그리스어로 리톤(Rhyton)이라고 하는데, 원래 동물의 뿔을 잘라 만든 잔이다. 그러나 동물의 뿔



로 만든 것 이외에 土製(토제)나 銅製(동제)로도 동물의 뿔 모양을 본떠 만든 것도 있다. 삼국유사 탈해



왕 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각배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昔脫解(석탈해)다. 어느날 昔脫解가 토함산



에 오르다가 목이 말라 하인에게 물을 떠오라고 했는데, 하인이 脫解 몰래 먼저 물을 마셨다. 그 순간에



물을 담은 각배가 하인의 입에 붙어버렸다. 脫解가 이를 보고 하인에게 추궁했더니 잘못을 뉘우쳤다. 그



러자 角杯가 입에서 떨어졌다.









▣ 김재원 - 고맙고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재익 - 토착민과 도래인의 잘 융합된 국가형성?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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