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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57) 3.1운동의 상해7. 천장절 행사를 노리고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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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18 11:24 조회1,4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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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천장절 행사를 노리고

그 후, 왜의 신문인 상해 일일 신문에 천장절 축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벤또 - 도시락 - 와 물통 하나와 일장기 하나를 휴대하라는 포고가 났다.

이 신문을 보고 나는 곧 서문로(西門路) 왕 웅(王雄) - 본명은 김홍일(金弘逸) -을 방문하여 상해 병공창장 송식마(宋式 )에게 교섭하여 일인이 메는 물통과 벤또 그릇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한에 보내주기를 부탁케 하였더니 왕 웅이 다녀와서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병공창으로 오라고 한다 하므로 가 보니 기사 왕백수(王伯修)의 지도 밑에 물통과 벤또 그릇으로 만든 두 가지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여 보여주었다.

시험 방법은 마당에 토굴을 파고 그 속을 사면으로 철판으로 싸고 폭탄을 그 속에 넣고 뇌관으로 긴 줄을 달아서 사람 하나가 수십 보 밖에 엎드려서 그 줄을 당기니 토굴 안에서 벼락 소리가 나며 깨어진 철판 조각이 공중을 날아오르는 것이 아주 장관이었다.

뇌관을 이 모양으로 20개나 실험하여서 한 번도 실패가 없는 것을 보고야 실물에 장치한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 병공창에서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동경 사건에 쓴 폭탄이 성능이 부족하였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라고 왕 기사는 말하였다. 그래 20여 개 폭탄을 이 모양으로 무료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물통 폭탄과 벤또 폭탄을 병공창 자동차로 서문로 왕 웅 군의 집까지 실어다 주었다. 이런 금물을 우리가 운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친절에서였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중국 거지 복색을 벗어 버리고 넝마전에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입어 엄연한 신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씩 둘씩 이 폭탄을 날라다가 법조계 안에 사는 친한 동포의 집에 주인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라고 알리지 아니하고 다만 귀중한 약이니 불조심만 하라고 이르고 까마귀 떡 감추듯 이 집 저 집에 감추었다.

나는 오랜 상해 생활에 동포들과 다 친하게 되어 어느 집에를 가나 내외가 없었다. 더구나 동경 사건 이래로 그러하여서 부인네들도 나와 허물없이 되어,

"선생님, 아이 좀 보아 주세요"

하고 우는 젖먹이를 내게 안겨 놓고 제 일들을 하였다. 내게 오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잘 논다는 소문이 났다.

4월 29일이 점점 박두하여 왔다. 윤봉길 군은 말쑥하게 일본식 양복을 사 입혀서 날마다 홍구 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서 그 당일에 자기가 행사할 적당한 위치를 고르게 하고 일변 백천 대장의 사진이며 일본 국기 같은 것도 마련하게 하였다. 하루는 윤 군이 홍구에 갔다가 와서,

"오늘 백천이 놈도 식장 설비하는 데 왔겠지요. 바로 내 곁에 와 선단 말예요. 내게 폭탄만 있었더면 그 때에 해버리는 건데..."

하고 아까와하였다. 나는 정색을 하고 윤 군을 책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포수가 사냥을 하는 법이 앉은 새와 자는 짐승은 아니 쏜다는 것이오. 날려 놓고 쏘고, 달려 놓고 쏘는 것이야. 윤 군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일에 자신이 없나 보구려."

윤 군은 내 말에 무료한 듯이,

"아니오. 그놈이 내 곁에 있는 것을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내일 일에 왜 자신이 없어요, 있지요"

하고 변명하였다.

나는 웃는 낯으로,

"나도 윤 군의 성공을 확신하오. 처음 이 계획을 내가 말할 때에 윤 군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지 않았소? 그것이 성공할 증거라고 나는 믿고 있소.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 마음이 움직이는 게요"

하고 내가 치하포에 토정양량을 타살하려 할 때에 가슴이 울렁거리던 것과 고 능선 선생에게 들은,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라는 글귀를 생각하매 마음이 고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윤 군은 마음에 새기는 모양이었다.

윤 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金海山) 군 집으로 가서 김 군 내외에게 내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동삼성 - 만주라는 뜻 - 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은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 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 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오?"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 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 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월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는 윤 군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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