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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27)현령공(김자완-문온공증손)배위 청주한씨(한확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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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9-25 12:34 조회1,8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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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현령을 지내신 김자완 선조님의 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온공(김구용)-부사공(김명리)-참의공(김중서)-현령공(김자완)

 

현령공의 배위이신 청주한씨는 세조의 배향공신인 한확의 따님이십니다.

 

한확의 큰딸은 한성판윤을 지낸 김계녕,

둘째는 세종대왕과 신빈소생인 계양군(이 증)이며,

셋째따님이'바로 현령공의 배위이십니다.

넷째는 좌리공신 지돈령부사 공안공 한치인

다섯째는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덕종비인수대비)이시며

여섯째는 병조판서 장도공 한치의

일곱째는 서릉부원군 장간공 한치례입니다.

 

 

한확(韓確)
1403(태종 3)∼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영정(永矴)의 아들이며, 덕종의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고,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鴻#여26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자 1429년에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죽었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하였지만,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계양군(桂陽君)
?∼1464(세조 10).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증(璔), 자는 현지(顯之). 아버지는 세종, 어머니는 신빈 김씨(愼嬪金氏)이며, 부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계양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의 총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도 잘 썼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韓明澮)·한확 등과 함께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난을 도왔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1등에 책정되었다. 세조의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아 신임을 얻었다.
남을 대접함이 겸손하여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나, 주색에 빠져 일찍 죽었다. 시호는 충소(忠昭)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세종 19)∼1504(연산군 10). 조선 세조의 장남인 덕종의 비(妃). 성은 한씨 (韓氏). 본관은 청주(淸州). 서원부원군 확(確)의 딸이며, 좌리공신(佐理功臣) 치인 (致仁)의 누이동생이다.
1455년(세조 1)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粹嬪)에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횡사하였다.
1470년(성종 1) 소생 혈(娎)이 성종에 즉위하여 세자로서 죽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자 왕후에 책봉되고, 이어서 인수대비 (仁粹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성종이 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하였다. 불경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하였고 부녀자를 위하여 지켜야 할 도리인 《내훈 內訓》을 간행,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손자 되는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에 의하여 폐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박해를 가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대비가 이를 꾸짖으니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받아 얼마 후 절명하였다. 능은 경릉 (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西五陵)에 덕종과 합장되어 있다.

 

한치의(韓致義)
1440(세종 22)∼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의지(誼之). 좌의정 확(確)의 아들이며, 성종의 생모인 인수왕비(仁粹王妃:昭憲王后로 改封)의 동생이다.
1455년(세조 1) 사정 겸상서녹사에 음보(蔭補)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다른 사람의 답을 빌려서 썼다는 세평을 들었다.
1459년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을 거쳐, 군기시부정을 역임하였다.
1464년에는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었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선전관·훈련원도정 등 군의 요직을 맡았다. 예종즉위 후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맡고 1470년(성종 1)에 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에 올랐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에 녹훈되고 청양군(淸陽君)에 봉하여졌다. 공조참판으로 옮긴 뒤 1472년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이듬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호는 장도(章悼)이다.

 

한치례(韓致禮)
1441(세종 23)∼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절(子節). 아버지는 좌의정 확(確)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466년(세조 12) 훈련원도정이 되고, 이어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진하였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의 외숙으로서 중용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1471년(성종 2)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서릉군(西陵君)에 봉하여졌으며, 1473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1477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9년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0년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좌참찬이 되었다.
148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그뒤 호조·병조·공조의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494년 이철견(李鐵堅)의 범간사건(犯奸事件)에 관련되었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겸도총부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 영돈녕부사로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왕실의 인척으로서 아버지 확 이래 명나라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명나라로부터 ‘한족(韓族)’이라 불렸다.
시호는 장간(莊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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