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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공(휘 시열) 종가 유물 소개26-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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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9-25 13:10 조회1,6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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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유화(필자의 6대조부) 통문(通文)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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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문 소개>

1. 원본 소장처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 양덕공 종손가

2. 발견일시 : 1985. 8.

3. 발견자 : 김항용

4. 번역 정리일 : 1차-1989. 12.     2차-2005. 6. 22.(김익수 감수)

5. 원본 및 사진 크기 :  가로(50Cm ) × 세로(80Cm)

6. 원문 작성일 : 1827(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7. 작성자 : 金由和

8. 역문

  右文을 돌립니다. 

  조상 선대를 추모하는 것은 天賦의 양심이며, 분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人道의 常事라 함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요, 또한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의 종가에 이르러서는 홀로 그렇지 못하니 어찌 개탄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저의 監司公[휘 素] 承旨公[휘 龜萬] 양대 산소의 위토(位土)가 창설 초기에는 있었으나 풍요로움과 검소함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살다가 그 후 종가는 세세로 가난하고 또한 그 삶에 항상스럽지 못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할 수 없는 지경을 만나게 됐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막중한 묘소에 대해 마침내 향불을 마련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즉 이미 지나간 일은 먼저의 하늘 운에 붙이지만 요즘에는 禁伐하는 명령이나 주장하는 사람도 없으니, 멀고 가까운 초동과 牧夫들이 마치 주인 없는 빈산으로 보며 왕래하는 행인들은 손가락질 아니 함이 없습니다.

  한탄스럽습니다. 옛날을 거슬러 보고 지금을 살펴보니 슬픈 눈물이 옷깃 적심을 알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무릇 자손된 자들은 생각건대 이런 생각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지난 10여 년 전에 族人 한 소년이 거리낌 없이 애쓰고 고생하며 먼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글을 손수 전하여 묘역을 守護하는 계획을 소상히 알렸습니다. 대개 그 본심은 선조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본토의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의견을 물었고 그 뜻을 하나로 모두 수렴하였습니다. 이제 그 전의 경황이 없던 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야 가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살고 있는 5-6家는 비록 심히 가난하지만 이번 일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거절함이 없이 능력에 따라 분배하여 간신히 4냥씩을 준비하여 그 자본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수량을 합한다 해도 풍족하지 못하므로 옛 고장 각 처의 자손들이 마음과 힘을 모아 해마다 조금씩 노력한다면 운영하려는 일은 머지않아 가히 이룰 수 있으리라 봅니다.제 마음은 기쁘고 행복하여 그 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오면서 소문에 들으니 2-3명의 자손이 그 돈을 사사로운 개인 재산으로 만들어 삼켜 버린  뒤에는 다시 그 비용을 내놓을 뜻이 없다고 하니, 그런 마음의 소재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겉으로는 선조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리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살찌우게 하는 계획에만 힘을 다하며, 선영의 묘에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 것을 거만하게 보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으로 살펴볼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종가에 이처럼 無禮한 사람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 나머지 모든 親族들은 老少 할 것 없이 손을 소매에 넣고 입을 다물고는 마침내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게으르기가 가히 후풍(순후한 풍속)에 가까우니 이런 도리 밖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는데로 일을 되돌리는 것이며, 도리어 이것은 친족을 박대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기시면 당장 굽어 꾸짖음을 가해 주시고 그 불가한 사유를 밝혀 주실 것이며, 만약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당장 그것을 구별해 내어 추궁하고 조사할 것이며, 宗中의 몇사람에게 각자 정한 한도를 담당시키어 선영의 땅을 길이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위와 같이 삼가 槐山, 淸州, 淸安, 忠州의 各 宅에 通文합니다.


收錢有司   鎰

           由和[1775(영조51)--1835(헌종1)

정해(丁亥:1827. 순조 27. 필자 53세). 3월 15일

族末(먼 일가). 燾, 氵+廣(+아래에 불화 점 네개), 体(+아래에 불화 점 네개), 聲義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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