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장군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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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9-30 20:13 조회1,652회 댓글1건본문
■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8/27
금강사(金剛祠)에서 서북쪽으로 2백 보쯤 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언덕 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송악당이라 한다. 전설에는, "고려 원종(元宗)이 원 나라의 명을 받들고 장군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금강사에 머물렀다. 그때에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하였다." 한다.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지낸다.
동국여지승람에서
■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12/25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제9권 (9)
[丘] 모으다(聚). 4정(井)이 1읍(邑)이고 4읍이 1구(丘)이다.
[송악소구(松岳小丘)]: 고려 원종(元宗)이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김방경(金方慶)을 보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적에 군사들이 합포(合浦)에 이르러 송악(松岳)의 작은 언덕 위에 주둔 하였다.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고을 사람이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2 昌原都護府 ‘山川’ ‘合浦’>
합포(合浦): 지금의 경남 마산시 지역을 가르킴.
■ 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松嶽壇(송악단)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세종때 지리지를 보면 府北 3里에 있는 [盆山城隍護國之神](분산성황호국지신)에게 守令이 行祭한다고 나와 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金剛川
盆山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로 西上洞과 大成洞의 경계가 되며, 지금은 대부분 복개되었다.
●金剛社址
송악산 아래에 있었던 큰 사찰이며, 그 때문에 이 마을을 大寺里라고 불렀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까지는 金剛社라고 했으며, 충렬왕때(1274-1281) 東征하는 함선의 출발지점인 합포(마산)로 가기 위하여 왕이 금주(김해)로 내려왔을 때 이곳에 行宰(행재)하고, 社 앞의 한 茶나무를 보고 將軍茶(장군차)의 이름을 내렸다.
태종때 영의정 하륜이 지은 金剛社不毁樓記(금강사 불훼루기)와 서거정의 金剛社詩가 邑誌에 나온다.
금강불훼는 불교에서 나오는 말이며, 도관찰사 안순이 김해부사 현맹인에게 명하여 승도의 힘으로 불훼루를 쌓고 남쪽에는 물을 끌어와서 연못을 만들고, 동쪽에는 토계를 쌓아 그 위에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세종21년 (1439) 관찰사 이선이 도절제사 이교와 함께 이 루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루가 무너져 압사자가 8명이나 되었으므로 1명이 파직된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
■ 국역 김해읍지 (김해문화원, 1984)
壇廟(단묘)
●松嶽壇(송악단)
府北 3里에 있음. 고려장군 金方慶이 일본을 토벌할 때 여기서 빌어 신령의 도움이 있었다. 지금 폐지됨
佛宇(불우)
●金剛社(금강사)
府北 大寺里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때 합포에서 때때로 오는 사람들이 여기서 놀았다. 不毁樓(불훼루)가 있다.
영의정 하륜의 불훼루기에 왈 --- 후 략 ---
■1937년(정축) 9월에 발행된 안동김씨화수록 권2
■1956년에 발간된 안동김씨보감
<원문>
忠烈公 尊影
高麗國都元帥金方慶
忠烈公
高麗元宗朝에 金海府松岳堂은 公이 南征時에 留次金剛社하사 祀松岳之神立堂也러니 邑人이 設 忠烈公尊影하고 兼祀 故로 以傳于世라 事在文獻備考
고려국 도원수 충렬공 김방경 영정
고려 원종조에 김해부 송악당은 충렬공이 남정시(일본정벌시)에 이곳 금강사에 머무르면서 송악의 신위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 공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은 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 김해시청 답변
현재 송악단이 있던 곳은 김해 구산동 백운대고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3호) 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릉의 하단부입니다.
김해여고 뒤편과 산복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재골 약수터 가는 길 중간에 있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실 경우, 동김해IC에서 활천고개를 지나 산복도로를 통해 삼계, 진영 쪽으로 가시다가 왼쪽편에 보이는 절개된 산봉우리 모양의 언덕 하단부에 백운대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 송악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주변환경은 동상대상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구획정리되었으며, 잔존한 유적 등은 없습니다.
■<꽃전설> 홀아비-바람꽃 (수필가- 박경용)
모짜르트의 포근한 산들바람/꽃을 자세히볼려면 꽃에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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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젯골은 만장대의 서북기슭에 자리잡은 약수터로 김해의 역사와 더불어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
고려때는 금상사(金剛砂)와 부전루(樓)가 있었으며 여몽연합군이 일시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 김방경(金方慶)將軍의 토왜재단(土倭齋壇)인 송악단(松嶽壇)과 장군차(將軍茶)로도 알려진다.
이곳에 흐른는 약수를 금령천(金鈴泉)이라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역사상 과거 제도가 정착되고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 이곳 서젯골은 선비들의 과거 준비하는 것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것은 여기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머리가 영특해 지고 과거에 합격하는 율이 높다는 속설이 있었다. 거기에다 신혼초에 이 물을 마시면 머리좋은 수재를 낳는다는 얘기도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경관이 좋고 물좋은 곳이니 아름다운 얘기와 전설이 없을 수 없다. 고려 후반기인 충선왕때였다. 이 때 향리들은 후기의 사회적 경제적 변동을 겪으면서 中小지주로 성장했는데 그 자제들의 학문적 교양을 쌓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는 경향이 높았고 이것이 젊은이들의 꿈이기도 했었다. 김해 무점에 사는 청년 김태은도 향리의 외아들로 태어나 청년이 되자 자기와 같은 신분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과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젯골 金靈泉부근에 자리잡고 그 물을 마시며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한다. 그 덕분인지 태은은 과거에 무난히 합격하여 청운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어 부모들은 혼사일을 걱정했으며 여러군데 혼담이 오갔다. 숙고 끝에 논실마을 李씨 집안의 따님과 결혼 하기로 했다.
태은이 꿈같은 신혼의 나날을 흘렀다. 서로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3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부인에게는 태기가 없었다. 3대 외동으로 내려온 집안에서 예사 일이 아닌 것 이었다. 부인에게 이것이 강박관념이 되어 일어났는지도 몰라도 병이 나버렸다.
여러 의원의 약을 먹었으나 명약이 무효였다. 온 가족 특히 남편의 병구한 지성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회복을 위해 온갖정성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자신의 여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감하는 것이었다.
"여보~당신께 미안해요, 내가 죽거든 이 흰 모시저고리를 만지며 마음을 달래세요 그리고 좋은 새아내를 만나거든 이 옷을 묻어주세요."
남편은 이말을 듣고 부인이 너무나 애처로와서 복바쳐 오르는 슬픔을 감출수 없었다. 이말을 남긴지 이틀 후 드디어 부인은 이승을 하직하고 태은이는 혼자몸이 되었다.
진심으로 부인을 사랑한 태은이는 밤마다 저고리를 안고 자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재혼을 독촉했었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히 어떤 낭자가 물을 길러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이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읽게 되었다. 홀아비의 마음속에 회오리 바람이 일게 된 것이다. 누가 홀아비 바람을 탓할 수 있으랴. 태은이는 낭자를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인연이 닿아 낭자와 밀회를 하게 된다.
이젠 전부인이 준 모시저고리를 만지기도 싫고 오히려 거북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 전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말한대로 이 모시저고리를 묻어 버리 자'
그는 한 손에는 호미, 한 손에는 저고리를 들고 과거준비때 오르내렸던 서젯골 금령천 약수터 아래길 옆에다 모시저고리를 묻었다. 그리고는 청손의 절차를 거쳐 재혼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흰모시 저고리는 태은이의 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봄 그 묻은 자리위에 흰꼿이 여러송이 피어난 것이다. 그리고 진한 향기가 났었다. 태은이는 이꽃을 보면서 만감이 스쳐갔다. 후세 사람들은 이꽃을 『홀아비 바람꽃』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누가 홀아비의 바람을 막으랴. 외로운 홀아비의 빈가슴을 그 누가 채워줄 수 있으리.
이렇게 노래하듯 홀아비 바람꽃은 해마다 봄이오면 진한 향기를 뿜으면서 희고 스담스래 피어나고 있다.
(다음 편을 기다리며)
【0008】김해 차밭골/2000년 가락혼 이어온 ‘장군차’(차따라:8)
한국일보 97.06.24 22면 (문화) 기획·연재
◎ 서기 48년 허왕후가 인도서 반입설
/지금은 인근언덕 50평 밭서 겨우 명맥
가락차의 자부심이었던 김해시 다전동 차밭골의 「장군차」. 도시개발에 떠밀려 명맥이 위태롭던 이 차는 4년전 가락의 옛 궁궐터인 봉황대 동쪽 언덕 50평짜리 밭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명맥은 잇고 있다.
김해 차인들의 장군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각별하다. 차인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사료를 들이 대며 자기 고장이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원지라고 주장하게 마련이다. 김해 또한 마찬가지다. 김해 차인들은 차의 역사에 대해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사보다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기사를 우선한다. 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차문화가 7세기에 시작돼 9세기때 꽃피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당나라에 갔다가 돌아 온 사신 대렴이 차씨를 가져 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도록 했다. 차는 이미 선덕왕(632~646)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중 「가락국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차문화의 시원은 이보다 500년을 더 거슬러 올라 간다. 「신라 30대 법민왕(661~681·시호 문무왕)이 661년 가락국 수로왕은 내 15대조가 되므로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사당은 남았으니 제전을 행하도록 명을 내려 수로왕 17대손 경세급간에게 거등왕 당시와 똑같이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과 밥과 차와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말고 행하도록 했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부터 구형왕 말기에 이르기까지 330년동안 묘의 제사는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 용삭 원년(661년)에 이르기까지 60년 사이에는 묘의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했다」
또 이능화(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는 「김해의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 향토문화연구소장 김종간씨가 발췌한 구전 야사는 이를 한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비가 되고자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올 때 옥으로 만든 함에 차씨를 담아 와 첫밤을 새운 명월산에 심도록 했다. 명월산 명월사에는 차를 담당하는 스님이 있었으며 철에 맞춰 차를 궁에 바쳤다. 이 차는 그 이름이 이웃 왜에까지 알려져 왜가 사람을 보내 차를 구해 갔다」이런 기록과 구전을 근거로 김해 차인들은 허왕후가 김해땅에 발을 디딘 서기 48년을 가락차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한편 조선 인조(1623~1649)때 의 「김해지」는 김해 차인들의 자부심을 부추긴다. 「차밭골의 골짜기를 금강곡이라 하는데 금강곡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수도장이다. 고려 충렬왕(1274~1308)이 금강골의 차나무를 보고는 수레를 멈추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이처럼 명성이 자자해 가락차를 상징했던 「장군차」는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그 이름이 잊혀져 간다. 더욱이 82년 가락 고도 김해가 시로 승격된 후 「장군차」는 위기를 맞게된다. 80년대말 도시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차밭골을 지나는 산복도로가 뚫리고 아파트가 잇달아 들어 섰다.
89년 12월 부산차인들을 주축으로 수로왕 위패를 모신 숭선전에서 지리산 차밭에서 딴 차로 차례를 올렸다. 이후 해마다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차가 제상에 올랐다. 유구한 가락의 차맥이 되살아 나는 듯했지만 정작 「장군차」의 본향인 차밭골은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김소장 등 김해의 차인들이 똘똘 뭉쳐 「차밭골 성역화 운동」을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300년이 넘은 200여 그루의 차나무가 그대로 불도저밑에 깔려 버렸다. 김해 차인들은 결국 성역화 노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차밭을 봉황대 동쪽 언덕에 조그맣게 옮겨 「장군차」의 맥을 잇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봉황대 차밭에서 동북쪽으로 바로 보이는 차밭골 일대에서는 지금도 각종 공사가 한창이다. 2,000년 가락의 혼이 어린 유서깊은 「장군차」는 이제 봉황대에서 겨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김해시는 시승격과 함께 시가지 동서남북을 잇고 있는 16개의 길이름을 새로 지었다. 구지로, 패총로 등 역사의 향기를 일깨우는 길이름에는 다전로라는 이름이 있다. 서상동에서 수로왕릉과 동광초등학교, 활천고개를 지나 차밭골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이어진 610m의 길. 우리나라에서 차와 관련한 첫 길이름으로 김해 차인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 입문
/차는 냄새·습기 흡수 빨라 캔·병 등에 밀봉 보관해야
먹고 남은 찻잎은 탈취제로 사용될 만큼, 차는 다른 향기를 쉽게 빨아 들인다. 이때문에 자칫 잘못 보관하면 잡내가 밴다. 한번 잡내가 배면 본래 차맛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요즘 유통되는 차는 절반 이상이 티백형이다. 그만큼 차가 일상화 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종이와 셀로판으로 만들어진 티백으로는 차맛을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점은 잊고 있다. 차상자 포장을 뜯은 다음부터 보관은 소비자 몫이다. 외국의 경우 티백도 하나하나 진공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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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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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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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해여고 뒤편과 산복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재골 약수터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송악단, 백운대라는 비석이 있는 곳,
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