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60)기적장강만리풍2. 장개석과의 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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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10 16:10 조회1,435회 댓글0건본문
2. 장개석과의 협의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歐美文明)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당, 송, 원, 명,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衣冠), 문물(文物), 실준중화(實遵中華)라는 것이 이조 5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뿐이요, 이용 후생에 관한 것은 없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 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朱子學)으로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拱手爲座)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 싸움과 의뢰심뿐이다.
오늘날로 보아도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 민족 혁명은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 마디에 돌연히 민족 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류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 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란ㄴ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砂灰橋) 엄항섭 군 집으로, 오룡교(五龍橋) 진동생(陳桐生)의 집으로 옮아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朱愛寶)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鎭明寺)는 유명한 도주공(陶朱公)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 -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다 -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陶朱公遺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였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일 줄이야 뉘라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 씨 댁과 진 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서 살면 행색을 감추리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리라 하여 뱃속에서 살기로 하였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가에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박 남파(朴贊翊), 엄 일파(엄항섭),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와 정보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동정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박 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이던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요,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陳果夫)와 면식이 있어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貢沛誠), 소 쟁(蕭錚) 등 요인들이 진과부 씨를 대표하여 나를 나와 맞아 중앙반점(中央飯店)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튿날 밤에 중앙 군관 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 옷을 입은 장 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 주었다.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 각 민족은 손 중산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부합하는 민주 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 左右 : 주변의 사람들을 잠시 내보냄 - 편집자 주*)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하였더니 장 씨는,
"하오하오(좋소)"
하므로 진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동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 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 씨가 붓을 들어,
'請以計劃書詳示(계획서를 써서 자세히 보여주기를 바란다는 뜻 - 편집자 주*)'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드렸더니 진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석을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 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 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군관 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 양성소로 하기로 작정되어 제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李靑天)과 이범석(李範奭)을 청하여 교관과 영관이 되게 하였다(그러나 이 군관 학교는 겨우 제1기생의 필업을 하고는 일본 영사 수마(須磨)의 항의로 남경 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렸다).
이때에 대일 전선(對日戰線) 통일 동맹(統一同盟)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金元鳳)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秦淮)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 운동에 참가하겠은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 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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