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29)병사공(김윤종)의 배위 후안동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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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11 12:09 조회1,926회 댓글0건본문
외갓댁 고모댁 (29) 김윤종(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종)의 배위 후(신)안동김씨
가선대부 경상좌병사를 지내신 병사공(김윤종)의 배위는 후안동김씨입니다
족보에나 당시에 세운 비문에도 풍산김씨라고 되어 있으나 친정아버지(김영수), 할아버지(김계권), 증조할아버지(김삼근)이라고 족보에 적혀 있으니 분명히 후안동김씨입니다.
당시에 아버지(김영수)는 풍산에 별서를 갖고 있었고 일족이 풍산에 세거하고 있으니
풍산김씨라고 적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후안동김씨는 고려의 태조(왕건)을 도와 태사에 이른 金宣平을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후안동김씨의 족보를 보면
金宣平(太師公)-習敦-呂基-熙-資-斤重-
이때까지는 후안동김씨 족보에만 기록이 있고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등 어느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음斤重의 아들 得雨(典農正)-革(奉禮郞)의 기록으로는 문과에 급제한 김계행 (1431-1521(세종13-중종16)의 기록에
증조(김득우)조(김혁)부(김삼근)이 처음 나옵니다.
이로보면 고려시대의 조상은 김선평-김근중까지 6명으로 나옵니다.
실록에 나오는 사람은 金革의 아들인 金三近(비안현감)이 처음입니다.
(김삼근은 비안현감을 지낸 것으로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족보상에는 김혁의 아들로서는 1金三近, 2金三益(漁潭公). 3.金三友 입니다.
김삼근은 한성판관을 지낸 金係權, 定獻公 金係行(寶白堂)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김계권은 이조판서를 지낸 權孟孫의 딸을 맞아 1.學祖(증谷大師)-스님 2.永銓(감찰)
3.永내(진사) 4.永錘(수원부사) 5.永銖(사헌부장령)을 두었으며
사헌부 장령 김영수는 강릉김씨 현령 金博의 딸을 취해 아들 金瑛(三堂), 金번(평양庶尹), 金珣(진사)와
딸은 우리 안동김씨(선안동김씨) 문온공 후손 金胤宗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종)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당시에 우리 안김과 후김과는 이렇게 혼맥이 이어졌으며 병사공(김윤종)의 처남인 김번의 묘비명은 서운관정공파의
동고공 김로 선조님이 쓰셨습니다.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의 아들이 신천군수를 지낸 金生海인데 성종의 9남 경명군의 딸을 취해 김대효, 김극효, 김달효의
세 아들을 두었으나 김대효는 손이 없어 김극효을 둘째 아들 김상헌을 양자로 이어옵니다.
김극효은 정유길의 딸과 혼인하여, 김상용, 김상헌을 낳았습니다.
이후 김상헌-김광찬-김수항,김수증-김창집,김창협,김창흡,등 인물이 나면서 조선 중기에서부터 권력의 중심에 서서 조선말기(순조, 헌종, 철종)60년 세도로 이어저 옵니다.
김영수(金永銖)1
1446(세종 28)∼1502(연산군 8).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적옹(積翁). 아버지는 한성판관 계권(係權)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숙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고, 성품이 민첩하고 사무에 숙달되어 옥사를 잘 다스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나서 사헌감찰에 제수되고 상주판관이 되었다.
또,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도감랑(都監郎)이 되어 잘 접대하여 명예를 드날리고 의금부·경력·도총부사·중추원도사가 되었다. 이어 영덕현령으로 나아가 벽지와 해지(海地)의 수령들이 부지런히 다스리지 않자 이를 징계하고 엄징하게 하여 기민을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다.
이어 선공첨정·장령·상의원옹·통례원봉례를 거쳐 영천군수·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사어위기음률(射御圍棋音律)을 잘하였고, 팽임공장(烹#임09工匠)이 되어 음식을 삶는 일에 종사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김번(金璠) 1479(성종 10)∼1544(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문서(文瑞). 아버지는 장령 영수(永銖)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 현령 박(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사·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평양서윤·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전적 때 관북지방에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뽑혀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양서윤이었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쓰고 민식(民食)과 창름(倉#늠01)을 넉넉히 하며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림들로부터 많은 기롱(譏弄)을 받았다. |
김영(金瑛)3
1475(성종 6)∼1528(중종 2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 영수(英銖)의 아들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에는 대교에 올라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등과 더불어 사신의 정도를 내세우며 사초문제(史草問題)로 빚어졌던 무오사화의 피화인(被禍人)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그뒤 수찬·정언·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 청요직을 지냈으며, 1518년(중종 13)에는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이 되었다가 곧 김제군수로 외직에 나갔다.
1522년에는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1527년에는 강원도관찰사에 보임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곧 개체되었다. 조광조 등 중종 때의 사림파와 언로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등 정치적 성격을 달리한 인물이었다.
문집으로 《삼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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