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의 명당 (김번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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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0-12 11:14 조회2,014회 댓글0건본문
<효자동 교황청 대사관 자리>
효자동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육 상궁의 묵은 대문을 볼 수 있다. 그 길 건너에 나무숲이 우거진 로마 교황청 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집터는 안동김씨 세도 인맥의 정점을 이룬 중종때 명신 김번(金璠)의 집터다. 그는 염병이 크게 번져 시체가 길거리에 데굴데굴했던 평양에 감사로 부임, 정치적 수완을 부려 단시일에 평양을 예전대로 복구시킨 정치가로 특히 평양에서는 대대로 잊을수 없는 감사라 하여 제사를 올렸던 분이기도 하다.
김번이 살았던 이 집은 서울에서도 유수하게 풍수 지리가 좋은 명당으로, 그 명당 덕분에 그의 후손이 조선왕조 중 가장 크게 또 가장 오래도록 세도를 부리고 또 학자도 많이 배출한 명문이 되었다고 속전돼 온 것이다. 이 집터를 김번에게 잡아준 것은 학조 대사로 대사는 바로 김번의 숙부가 된다. 바로 뒷산인 북악산은 풍수 지리에서 나무에 해당되는 목성이다. 이 목성의 정기를 받아 김씨 성이 왕성하려면 집의 형태를 마치 태극기의 왼쪽 위에 그리듯한 그런 괘 형태로 지어야 한다는 주역의 가르침대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나무는 불을 생하고 불은 금을 다루어 큰 그릇을 만든다는 풍수지리의 이치를 이용한 것이다.
이 풍수가 발복했음인지 그의 증손자 김상용은 우의정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원임 대신으로 갔다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강화섬 남문의 다락 위에서 자폭하여 충신이 되고 있다.
바로 김상용의 아우가 배청 척화(排淸斥和)의 대표적 인물인 좌의정 김상헌이다. 병자년 난 중의 남한산성에서 화의의 의논이 진행되었을 때 화의 국서를 찢고 통곡 끝에 6일간 단식으로 저항 하였었다. 그는 척화신 제1호로 청나라에 잡혀가 유폐당했던 것이다.
김상용의 후손으로 순조 때 정승 김이교(우의정), 김이재(판서), 김이양(판서), 김희순(판서), 김영순(판서), 김대근(판서), 김세균(판서), 김응균 그리고 두 명의 순조 부마가 탄생하고 있다. 대단한 인맥이 아닐 수 없다.
아우인 김상헌의 인맥은 보다 화려했다. 그의 손자에 김수홍, 김수항 두 영의정이 났고, 다시 김수항의 여섯 아들들이 소위 ‘육창(六昌)’으로 소문난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이다.
모두 도학과 학문.문장.시 그리고 청절로 뛰어난 당대의 명사들이다. 바로 이 육창의 후손들이 한말 유명했던 안동김씨 세도를 누리고 있다.
김창집 후손으로 순조의 국구가 됨으로써 세도의 문을 연 김조순(판서), 그리고 헌종 국구 김조근, 철종 국구 김문근, 김좌근(영의정), 김홍근(우의정), 김흥근(영의정), 김병시(영의정), 김병덕(좌의정), 김이소(좌의정)등 찬란하기 그지 없다. 가문이 번창하면 그 번창하는 이유를 풍수에 합리화시키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은 이 안동김씨 발복의 뿌리를 소급, 바로 김번이 살았던 북악 산하의 집터에 잡은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 사람들이 한양에 오면 이 집을 감지(鑑地)답사하고 가는 것이 하나의 격식처럼 돼 있었다 한다.(이규태의 600년서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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