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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문온공 김구용(金九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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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6-10-12 11:18 조회1,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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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문온공 김구용(金九容)(2)

[莊] 엄하다(嚴). 또 전장(田莊)을 말하기도 하고, 또 육달(六達)을 일러 장이라고도 한다.

자랑하다(矜)이다.

[야장(野莊)]: 척약재(惕若齋)가 ‘야장시(野莊詩)’를 지었다. “문을 닫고 끝내 보통 사람들은 접하지 않고, 다만 푸른 산만 내 누대에 들어 오는 것을 허락한다. 음악을 읊조리다가 잠이 오면 잠을 잘뿐, 나머지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네. [閉門終不接庸流, 樂便吟哦慵便睡, 更無餘事到心頭]” <金九容 惕若齋集>


[吟] 탄식하다(嘆) 신음하다(呻)

[학음(學吟)]: 척약재(惕若齋)는 민 급암(閔及菴)의 외손이다. ‘학음집(學吟集)을 남겼는데 그 시의 법이 매우 빼어났다. 급암(及菴), 목은(牧隱), 호정(浩亭)이 모두 ‘학음집’의 서문을 썼다. <東文選 卷93 ‘序’ : 河崙 ‘惕若齋學吟集序’>

민 급암(閔及菴): 고려후기 문신 민사평(閔思平)을 말함. 급암은 그의 호이다.

목은(牧隱): 고려후기 문신 이색(李穡)의 호.

호정(浩亭):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하륜(河崙)의 호.

[김구용(金九容)]: 자는 경지(敬之),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며 김방경의 증손이다.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判典校)에 이르렀다. 힘써 후학들을 진발 시키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에서 쉬고 있을 때에도 질문하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신우(辛禑)때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 하자고 의논 할적에 김구용과 이숭인(李崇仁)등이 글을 올려 물리치길 청하였다가 여흥(驪興)으로 유배 되었다. 그때 김구용은 자호를 ‘여강어은(驪江漁隱)’이라 하고, 강호에서 노닐며 날마다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다. 뒤에 행례사(行禮使)로 요동(遼東)에 갔는데 말을 늦게 바쳤다고 황제가 대리위(大理衛)로 유배를 명하였다. 유배지로 가던중 노주(瀘州)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문집이 세상에 전해진다.

대리위(大理衛): 중국 운남성(雲南省)지역을 말함.

노주(瀘州): 중국 사천성(四川省) 노현(瀘縣)지역임.


[踵] 발뒤꿈치. 또 뒤를 잇는다는뜻이다. 발자취(趾)

[질문상종(質問相踵)]: 김구용(金九容)이 후학들을 권면하니 여러 학생들 가운데 질문을 하는 자가 꼬리를 이었다. <東國輿地勝覽>


[理] 의리(義理). 바른 것이다(正). 옥을 다스리는 것이다.

[유사대리(流死大理)]: 김구용(金九容)이 행례사(行禮使)로서 요동(遼東)에 갔다가 경사(京師)로 붙들려가서 대리부(大理府)에 유배되었는데 병이들어 가는 도중에 죽었다. 김구용이 죽을 때 말하기를 “내가 집에 있으면서 아녀자의 보살핌 속에 죽으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지금 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나라 일로 죽으니 내가 제대로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詩林, 註>


[深] 깊다(邃)

[정심(精深)]: 척약재(惕若齋)의 시는 평이하고 담박하고 정밀하고 깊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척약재(惕若齋): 고려말의 문신 김구용(1338~1384)의 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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