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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61)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3.피난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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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13 16:03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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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난을 떠나다

얼마 후에 소위 오당 통일 회의(五黨統一會議)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義烈團), 신한 독립당(新韓獨立黨), 조선 혁명당(朝鮮革命黨),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 미주 대한인 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이 통일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은 임시 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 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이던 김규식(金奎植), 조소앙(趙素昻), 최동오(崔東旿), 송병조(宋秉祚), 차이석(車利錫),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悅)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는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양기탁, 유동열 등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 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구나 하고 임시 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양씨에게 오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 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 차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 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각원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 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 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오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있었다.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楊小碧),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 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에 떠서 선중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 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와 김 구였다. 이에 송병조,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 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 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오당 통일론이 나왔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이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 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조직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은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 사령관 곡정륜(谷正倫)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 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 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찰 일곱이 부자묘(夫子廟)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淮淸橋)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 주던 주애보를 매삭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海南島)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시 경관이 호구 조사를 오더라도 주애보가 나서서 설명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본색을 탄로할 필요는 없었다.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일본에 대하여 항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인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오당 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쪽쪽이 분열되어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 대한 독립단은 탈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의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임시 정부는 점점 힘을 얻게 되었다.

중일 전쟁은 강남에까지 미쳐서 상해의 전투가 날로 중국에 불리하였다. 일본 공군의 남경 폭격도 갈수록 우심하여 회청교의 내가 들어 있는 집도 폭격에 무너졌으나 나와 주애보는 간신히 죽기를 면하고 이웃에는 시체가 수두룩하였다. 나와 보니 남경 각처에는 불이 일어나서 밤하늘은 붉은 모전과 같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흩어진 시체 사이로 마로가(馬路街)에 어머님 계신 집을 찾아갔더니 어머님이 친히 문을 열으시며, 내가 놀라셨겠다는 말에 어머님은,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더군"

하시고,

"우리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 길로 동포 사는 데를 돌아보았으나 남기가(藍旗街)에 많이 있는 학생들도 다 무고하였다.

남경의 정세가 위험하여 정부 각 기관도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으므로 우리 광복 전선(光復戰線) 삼당(三黨)의 백여 명 대가족은 물가가 싼 장사(長沙)로 피난하기로 정하고 상해, 행주에 있는 동지들에게 남경에 모이라는 지시를 하였다. 율양( 陽) 고당암(古堂菴)에서 선도(仙道)를 공부하고 있는 양기탁에게도 같은 기별을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어 그 가권을 데려오되 그의 맏형수 고(故) 안 의사 중근 부인을 꼭 모셔오라고 신신 부탁하였더니 안공근이 돌아올 때에 보니 제 가권뿐이요, 안 의사 부인이 없으므로 나는 크게 책망하였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먼저 신위부터 안아 뫼시는 법이어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 위하여 몸을 버린 의사의 부인을 적진 중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는 다만 안공근 한 집의 잘못만이 아니라 혁명가의 도덕에 어그러지고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은 피난하는 동포들의 단체에 들기를 원치 아니하므로 제 뜻에 맡겨 버렸다.

나는 안휘(安徽) 둔계 중학(屯溪 中學)에 재학 중인 신이를 불러오고 어머님을 모시고 영국 윤선으로 한구(漢口)로 가고 대가족 백여 식구는 중국 목선 두 척에 행리까지 잔뜩 싣고 남경을 떠났다.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신이를 데리고 한구를 거쳐서 무사히 장사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로 임시 정부의 문부를 가지고 진강을 떠난 조성환, 조완구 등은 남경서 오는 일행보다 수일 먼저 도착하였고, 목선으로 오는 대가족 일행도 풍랑을 겪었다 하나 무고히 장사에 왔다. 남기가 사무소에서 부리던 중국인 채 군이 무호(蕪湖) 부근에서 풍랑 중에 물을 길어 올리다가 실족하여 익사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는 사람이 충실하니 데리고 가라 하시는 어머님의 명령으로 일행 중에 편입하였던 것이다.

내가 남경서 데리고 있던 주애보는 거기를 떠날 때에 제 본향 가흥으로 돌려 보냈었다. 그 후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은 그 때에 여비 백 원만 준 일이다. 그는 5년이나 가깝게 나를 광동인으로만 알고 섬겨 왔고 나와는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 중에 생겨서 실로 내게 대한 공로란 적지 아니한데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 줄 알고 노자 이외에 돈이라도 넉넉하게 못 준 것이 유감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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