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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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13 14:22 조회1,344회 댓글0건본문
한 詩人의 作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作者의 주변 環境을 다양하게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荷潭의 詩文 속에는 작가의 다양한 體驗과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인생관과 세계관이 그의 文學으로 形象化 되어 있다.
본 장에서는 그가 살다간 時代와 生涯를 考察하면서, 그 속에서 그가 당시의 現實과 어떻게 조응해 나아갔는가를 살펴보도록 한다.
1. 時代的 背景
荷潭이 活動한 16세기 말부터 17세기는 韓國社會에서 朋黨政治가 본 궤도에 오른 시기로 特徵지을 수 있다. 朋黨은 첨예한 黨爭의 弊端을 惹起시켰다. 宣祖는 즉위 후 士林들을 많이 登用했는데 그 결과 學風이 高潮되고 啓發됨에 따라 學問上의 見解 차이로 學派가 성립되었고 이것은 곧 黨爭을 유발하는 촉진제로 작용했다. 黨人은 자손대대로 세습되어 친척이나 인척까지 가담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支配階層은 政權爭奪에만 전념하여 國運은 점점 衰退할 수밖에 없었다.1) 朋黨의 分派는 權力鬪爭에서 비롯한 自己 分裂이 대부분으로 1580년대 東人이 南北으로, 1600년대에는 北人이 大小로 再分裂하여 性理學的 支配體制가 점점 더 그 矛盾을 보이게 되었다. 荷潭은 『涪溪紀聞』에서 黨爭에 대해 자세히 記錄해 놓았다.
沈義謙은 仁順王妃의 오빠로서 이로부터 조정이 처음 분당 되었다. 沈義謙을 편드는 자를 西人, 金孝元을 편드는 자를 東人이라고 하였다. 서로 배척하고 援引하여 조정이 고요하지 않으매, 有識한 사람은 다 근심하였다. 율곡 이이는 양쪽을 다 내쫓아 버리자는 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沈義謙은 개성유수가 되고 金孝元은 부령부사가 되니, 율곡은 疏를 올려,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으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심복시키기 어렵습니다.” 라고 논하였다. 金孝元은 三陟으로 옮기고 沈義謙은 완산윤으로 보내졌다. 율곡이 처음에는 양쪽 사이를 조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領袖가 됨을 면치 못하였다.2)
율곡 이이가 黨爭 혁파를 포기한 채 영수가 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정치 상황을 가히 짐작케 한다. 이 때 王統後嗣 問題로 大北과 小北이 분열하여 격한 대립 양상을 띠다가 光海君이 즉위(1608)함으로 인해 대북이 패권을 갖게 되었다. 光海정권은 외척인 柳希奮, 柳希發 등의 전횡으로 많은 원성을 샀다.
윗글에서 하담은 당쟁 問題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인식하고 고뇌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당시 黨爭의 논의가 이미 고질화된 상황이었지만 時論에 있어서는 항상 客觀的이며 公正性을 잃지 않았다. 黨色上으로 南人系列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고, 폭 넓은 雅量과 開明한 觀點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西人 老論系 人士들도 그가 쓴 詩文에 대해서는 拒否感 없이 읽었다.3)
大北 政權은 小北勢力 및 반대 세력의 一網打盡을 目的으로 1613년 癸丑獄事를 일으켜 인륜에 어긋나는 廢母 殺弟를 자행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性理學으로 무장된 儒士들에겐 鬪爭의 대상이었으며 現實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金時讓도 1612년 光海 4년 봄에 全羅都事로 나가게 되어 掌試官으로서 향시를 주관하였다. 당시
”臣下가 임금보기를 怨讐처럼 한다.”4)
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당시 光海君은 자신의 王權을 강화하고 正統性을 확립하기 위해 臨海君을 죽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殺害 했으며, 生母인 공빈 李氏를 왕후로 추증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었다. 金時讓은 이 같은 光海君의 동향에 매우 批判的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의금부에서는 그가 임금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하기를 아뢰었지만 그의 학문과 재주를 아껴 당시 정승이었던 李恒福이 힘써 구원하였고, 결국 그는 死刑에서 감형되어 함경도 鐘城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다음은 그가 귀양을 가면서 지은 詩다.
心跡本非欺白日 마음과 행동이 본래 하늘의 해를 속이지 않았으니
吉凶元不問蒼天5) 길하고 흉한 것은 본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正當性을 주장한 詩로 生死를 초월한 그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社會史的 배경으로 壬辰倭亂을 들 수 있다. 壬辰倭亂은 12세의 어린 나이인 김시양에게 父母를 잃는 슬픔과 生活苦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내가 젊어서 亂離를 만나 배우기를 놓쳐 입이 있어도 읽을 줄 몰랐다. 나이 15,6세가 되어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영광과 부귀를 많이 취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흔연히 흠모하였다.6)
光海 14년, 1622년에 李時楊에게 보내는 序에 그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는 슬픔을 겪고 공부를 못한 내용이 적혀 있다. 社會 全般的인 면에 있어서 壬辰倭亂의 被害는 당시 國家의 유일한 財政수단이며 民衆의 生活수단이었던 農業耕作地가 왜란 전에는 151만여 결이던 것이 亂 후 3년(宣祖 34년)에는 30만결에 불과했다.7)
농경지의 감소는 國家 財政의 궁핍과 支配層의 政權野慾을 한층 더 부추겼고, 난 후에도 黨爭은 계속되어 民衆들의 生活苦는 더 가중되었다. 7년간의 壬亂으로 國土는 荒廢化되고 기근과 질병은 만연했으며, 과다한 稅金 부과와 어지러운 政治 현실로 인해 朝鮮王朝 체제는 점점 弱化되어 갔다. 이는 識者層으로부터 現實的 矛盾에 대한 批判과 革新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또한 鮮初에서부터 크게 융성해 오던 주자학도 위에서 열거한 內憂外患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쳤다.
주자학의 目標인 治世의 구현은 有名無實化 되고 空理空談으로 흘러 주자학의 학문 경향에 대한 批判 思潮가 일어난 것이다.8) 壬辰倭亂과 丙子胡亂 후의 사회는 脫朱子主義와 함께 實學의 기풍을 일게 하여 統治秩序의 동요는 물론, 正統 漢文學에도 새로운 文風이 제고되었다. 즉 朱子學이 현실을 떠나 有名無實한 풍조로 흐른데 대한 새로운 學問的 경향이 서서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 시기를 文學的 측면에서 살펴보면 象村, 月沙, 谿谷, 澤堂 등의 4대가와 孤竹, 玉峯, 蓀谷 등의 三唐詩人 그리고 二才로 일컬어지는 東岳과 石洲 등이 활동하였던 시기였다. 이러한 文壇의 융성과 함께 당시의 漢詩思潮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9)
다음은 金台俊이 『朝鮮漢文學史』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국초 이래로 전하는 蘇黃의 詩風은 종언하고, 순수히 唐을 배우기 시작하여 삼당을 필두로 車五山, 李五峰, 柳於于, 崔簡易, 權石洲, 李東岳이 나와 문장정종으로 象·月·谿·澤이 난 것도 宣仁간의 일이다. 대저 목릉성세에는 盧守愼, 李珥, 李山海, 李植, 金尙憲, 鄭弘溟 등이 문병을 잡으니 壬辰, 丁卯의 兩亂을 두고 이렇게 제현이 空前絶後로 쏟아져 나온 것도 기특하지만 그 이유를 찾으면
1) 國內的 政勢가 점점 문화의 원숙한 기운에 든 것
2) 사대외교의 용의, 과거 제도의 엄시, 제유가 배출이 그 선구를 이룬 것
3) 명의 만력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명인을 배우는 學明風潮도 고조 되었다.”10)
麗末의 流風을 계승하여 중국의 蘇東坡를 오로지 推仰하여 오던 鮮初의 宋詩崇尙思潮는 朴訔, 李荇을 마지막으로 소위 강서파 詩風이 물러나고 차츰 唐詩崇尙思潮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는 詩의 모호성과 技巧 연마의 치중한 것을 批判하고, 자연스러운 生活의 感情과 人間의 풍부한 情緖를 表現한 것이다. 三唐詩人을 비롯한 많은 學唐詩人을 배출했고, 또 壬辰亂을 前後하여 명의 萬曆文化의 유입으로 인하여 明人을 배우는 學明風潮도 고조되었던 것이다.
穆陵盛世의 일군의 作家들과 作品을 주고받았던 荷潭 역시 이러한 學唐系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군의 作家란 谿谷, 澤堂, 象村의 아들인 申翊聖 등으로, 이들은 모두가 하담의 절친한 친구로서 시를 여러 수 주고받으며 交遊하였다. 이것이 學唐系譜라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가 된다.
그의 시에는 생활 속의 고독과 외로움을 자연과 대비시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이런 학당계보의 시적 특징을 신광한의 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趙隆熙가 “이 時期에 唐詩 風을 구현한 인물로 評價된 대표적 인물은 申光漢이다. 『惺叟詩話』에서는 그의 시가 淸絶하여 雅趣가 있다고 評價한 뒤, 네 편의 시를 소개하였다. 이들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이 淸澄한 自然과 대비되어 인상 깊게 묘사 되어 있다. ‘孤舟’, ‘澄江’, ‘靑山’, ‘烟雨’, ‘芳草’, ‘淸樽’ 등 맑은 詩語들이 적절하게 배치되게 쓰여 졌다.”11)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담의 시에서도 ‘芳草’, ‘靑山’, ‘孤舟’ ‘澄江’과 같이 청절하고 아취가 있는 시들이 다수 발견되는데, 이는 그가 학당의 계보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芳草”漸看平12) 芳草는 점점 화창하게 보이네
“芳草”已斜陽13) 芳草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芳草”暗歸程14) 돌아가는 길가 방초에 어둠이 오네
尊酒“靑山”暮15) 술잔 잡으니 靑山은 저물어 가고
驛程“芳草”入茫茫16) 역마 길 향기로운 풀이 넓게 펼쳐있어
“澄江”西下漾微凉17) 맑은 강 서편으로 내려오니 가는 물살 시원하고
“芳草”高低白鷺洲18) 芳草는 들쭉날쭉 흰 갈매기는 모래톱에
이러한 詩語들은 그가 學唐系譜의 일원임을 짐작케 하며 荷潭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1) 李炫熙, 『韓國史總論』, 日新社, 1985, pp.199~200.
3) 李佑成, 『荷潭文集』, 發刊 賀辭, 民族文化推進會, 2001, p.2.
4)『仁祖實錄』 卷44, 仁祖 21年 5月 31日, “臣視君如仇讐.”
6)『荷潭文集』 卷之九, 「送李時楊序」, p.265. “余少也, 遭難失學, 有口而不知讀. 年十五六歲, 見有擧進士者, 多取榮貴, 心欣然慕.”
7) 李炫熙 『韓國史總論』, 日新社. 1985, pp.199~200.
8) 전형대외 3인, 『韓國古典詩學史』, 「朝鮮中期의 詩學」, 기린원, 1981, pp.245~247.
9) 金台俊,『朝鮮漢文學史』, 朝鮮語文學會, 1931, pp.112~113.
11) 趙隆熙, 『朝鮮中期 漢詩 批評論』, 韓國文化社, 2003, p.152.
13)『荷潭文集』 卷之十,「送丁士推好恕朝天」, p.350.
15)『荷潭文集』 卷之十,「挽會寧李府伯」,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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