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제 36 회,안사연 정기산행 (예봉산)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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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10-03 19:31 조회2,082회 댓글0건본문
예봉산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읍 팔당리와 조안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는 683.2m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산과 마주보고 있다. 인근 주민들은 사랑산이라고 불러왔고, 옛 문헌에는 예빈산(禮賓山), 예봉산(禮蜂山)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 조선총독부 《조선지지자료》에 예봉산(禮峯山)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오늘의 이름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봉산의 본래 이름은 운길산이라 한다. 지금의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은 조곡산이었고, 그밖에도 옛날 배를 타고 영월, 정선, 충주, 단양, 춘천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한양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삼각산이 보이는 예봉산 아래 팔당에서 임금에게 예(禮)를 갖췄다고 해서 산 이름을 예빈산으로 지었다는 사실도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수림이 울창하여 조선시대 때는 인근과 서울에 땔감을 대주던 연료공급지였다.
정상 주변은 옛 성터 같은 돌무더기가 있다. 예전에는 신령단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헬기장으로 변했고, 삼각점(양수 26)과 예봉산악회가 세운 정상표지석이 있다. 정상에서 휘둘러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북동으로는 북한산과 도봉산. 불암산과 수락산도 보인다. 북쪽으로는 백봉, 천마산, 서리산, 축령산, 청우산, 깃대봉이 첩첩산중을 이룬다. 깃대봉 오른쪽으로는 청평과 함께 뾰루봉과 화야산도 보인다. 북동쪽 진중리 계곡 건너로는 운길산이 마주 보인다. 운길산에서 오른쪽으로는 중미산, 유명산, 대부산을 거느린 용문산이 보인다.
8개의 등산코스가 있으나 이번 안사연 정기산행은 유상영(柳尙榮) 묘소가 있고 동고공(휘 魯)께서 글씨를 쓰신 유정수 신도비가 있는 도곡리(동막골)에서 철문봉 서릉을 타고 예봉산 정상에 오르는 3번 코스로 정했습니다.
유상영(柳尙榮) : 원종개국공신으로 우의정에 오른 충경공 유량(柳亮) 손자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된 유정수(柳廷秀) 조부이다. 배위는 안동김씨로 군사공(휘 七陽)의 손녀이다.
유량(柳亮)
1355(공민왕 5)∼1416(태종 1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고려 밀직사(密直使) 계조(繼祖)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392년 이조전서(吏曹典書)로 있을 때, 조선왕조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397년(태조 6)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왜구가 침입하여오자 이를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다.
형세가 불리해진 왜구들이 항복을 청해오자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일거에 섬멸하려는 전략을 세웠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왜구들이 도망쳐버렸다. 그 죄로 합산(合山)에 유배되었다가 1398년 나주로 이치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있다가 1400년(정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문성군(文城君)으로 봉작되었고, 그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가 되어 변방을 살피고 돌아왔다.
1404년에 대사헌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문관대제학도 겸하였다.
그뒤 판한성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올랐으며,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413년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가 1415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조선왕조 창건에서 제도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명신 중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유정수(柳廷秀)
1451(문종 1)∼1501(연산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국준(國俊). 현감 주(霔)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에 오르고, 14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교서부정자가 되고 다음해 교서관(校書館)으로 옮겨와 박사로 승진되었다.
1490년 정언·형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영안도도사(永安道都事)에 제수되어 연변읍성을 쌓는 데 진력하였다.
1494년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조정랑을 지내고, 1497년(연산군 3) 봉상시첨정을 거쳐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이 사옥(史獄)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자 여러 동료들과 분연히 항론(抗論)하였으나, 왕의 분노를 사서 이산군(理山郡)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다음해 방면되어 돌아와 죽었다.
1533년(중종 28)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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