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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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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10-23 13:19 조회1,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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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은 43세 仁祖 1년(1623)에 仁祖反正이 일어난 후 流配에서 풀려났다.

 다음 詩는 그가 12년의 流配生活에서 풀려 돌아오면서 지은 詩이다.

        

    三角山光翠揷天      三角山의 빛은 파랗게 하늘에 꽂히고

    櫓聲遙戞漢江煙      노 젓는 소리 저 멀리 한강의 안개를 휘젓네

    周流南北四千里      4천리 남북 길을 周流하였으니

    一去長安十二年1)   한 번 서울 떠난 지 12년이네.


이처럼 그는 사면되어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그동안의 流配生活에서 괴로웠던 심정을 三角山을 바라보며 시로 형상화하였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金時讓은 그 지조를 높이 評價받고 등용되어, 禮曹正郞이 되었다가 兵曹로 전임되었고 儒將들의 추천에 뽑혀 弘文館副修撰에 올랐다.

仁祖는 反正 직후에 金時讓이 함경도에서 오랜 시간 流配生活을 했으며, 아울러 文臣으로서 軍事方面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하여 평안도 전방지역의 防備를 맡겼다.

43세(1623) 가을에 金時讓은 암행어사로서 함경도 지역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 때 함경도의 한 고위관료가 말과 인부를 징발하여 자신의 집으로 재물을 잔뜩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물건들은 관청에서 사용할 것들로, 百姓들과 지방의 군병들로부터 징수한 것이었다. 金時讓은 이들 일행을 적발하자, 말에 싣고 있던 물건을 뒤져 조목조목 적어서 왕에게 보고 하였다. 이 관료는 장물죄로 파직되었고, 이로써 함경도 지역의 관료들은 苛斂誅求를 일삼지 못하게 되었다.

44세(1624, 仁祖2)에 仁祖反正의 功臣이었던 李适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金時讓은 體察使 영의정 李元翼의 從事官이 되었다. 李适은 당시 용맹한 武將으로서 名聲이 자자하던 사람이었다. 反正 당시 李适은 反正軍을 지휘, 통솔한 공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一等 功臣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二等功臣으로 녹훈되어 북평사에 임명되자 불만을 품고 평안도 정예병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金時讓은 副察使 李時發과 함께 反亂을 진압하였다. 이에 그는 二等功臣에 올랐으며, 仁祖의 극진한 신임을 받아 후에 병조판서를 두 번씩이나 맡게 되었다. 司諫院 獻納을 거쳐 侍讀官으로서 중국 사신의 행차를 따라가는 상인들의 폐단을 아뢰어 바로 잡게 하였다. 10월에 吏曹佐郞 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1)『荷潭文集』卷之十, 「赦還舟行望三角山」,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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