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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62) 기적장강만리풍(寄跡長江萬里風 )4. 장사(長沙)에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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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10-23 15:43 조회1,5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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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사(長沙)에서의 생활

안공근의 식구는 중경으로 갔거니와 장사에 모인 백여 식구도 공동 생활을 할 줄 모르므로 저마다 방을 얻어서 제각기 밥을 짓는 생활을 하였다. 나도 어머님을 모시고 또 한 번 살림을 시작하여서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시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오늘날에는 이미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어머님이 계셨더면 상편을 쓸 때와 같이 지난 일과 날짜도 많이 여쭈어 볼 것이언마는 이제는 어머님은 아니 계시다.

이 기회에 나는 어머님이 내가 상처 후에 본국으로 가셨다가 다시 상해로 오시던 일을 기록하련다.

어머님이 신이를 데리고 인천에 상륙하셨을 대에는 노자가 다 떨어졌었다. 그때에는 우리가 상해에서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님이 중국 사람들의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 노자를 넉넉히 드렸을 리가 만무하다.

인천서 노자가 떨어진 어머님은 내가 말씀도 한 일이 없건마는 동아일보 지국으로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벌써 신문 보도로 어머님이 귀국하시는 것을 알았다 하면서 서울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서울에 내려서는 동아일보사를 가셨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사리원까지 차표를 사드렸다.

어머님은 해주 본향에 선영과 친족을 찾으시지 않고 안악 김씨 일문에서 미리 준비하여 놓은 집에 계시게 하였다.

내가 인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어머님은 당신의 생활비를 절약하셔서 때때로 내게 돈을 보내주셨다.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사건이 생기매 경찰은 가끔 어머님을 괴롭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어머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나오시라고 기별하였다. 그 때에는 내게는 어머님이 굶으시지 않을이만한 힘이 있다고 여쭈었다.

어머님은 중국으로 오실 결심을 하시고 안악 경찰서에 친히 가겨서 출국 허가를 청하였더니 의외로 좋다고 하므로 살림을 걷어치우셨다.

그랬더니 서울 경무국으로부터 관리 하나가 안악으로 일부러 내려와서 어머님께 경찰의 힘으로도 못 찾는 아들을 노인이 어떻게 찾느냐고, 그러니 출국 허가를 취소한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 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님을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님은,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什物)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님은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이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 중학교 재학 중인 인이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관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이의 답변으로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으로 간다고 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였다. 어머님이 상해 안공근의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의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師表)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님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님을 남경으로 모셨다가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하여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님이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님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채시고 어머님은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님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 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 놓으셨다.

장사로 옮아온 우리 백여 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 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지천하였고,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도임한 장치중(張治中) 장군은 나와 숙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나는 상해, 해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변성명을 하였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버젓이 김 구로 행세하였다.

오는 노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 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첫째는 조선 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호, 김학규(金學奎), 황학수(黃學秀), 이복원(李復源), 안일청(安一淸), 현익철(玄益哲)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 독립당이니 조소앙, 홍 진, 조시원(趙時元) 등이 그 간부며,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창설한 한국 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붕준, 엄항섭, 안공근, 양 묵(楊墨), 민병길(閔丙吉), 손일민(孫逸民),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상 3당이 통합 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 혁명당 본부인 남목청(南木廳)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 출석하여 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 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웬일이냐 한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사가 회진할 때에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은 웬 것이냐 한즉,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 하므로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내게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그날 밤, 조선 혁명단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무 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게 금전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는 이운한(李雲漢)이가 회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여 첫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하고, 넷째방에는 이청천이 경상하였는데 현익철은 입원하자 절명하고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범인 이운한은 장사 교외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고 연루자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 등도 잡혔었으나, 강, 박 양인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하여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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